판도라의 꿈 / 고전 모에게
감상2016. 7. 1. 19:25
제작사/타이틀 : PAJAMAS SOFT / パンドラの夢
발매일 : 01.11.22
장르 : 루프 ADV
원화: 오노 테츠야
시나리오:카가미 히로유키
* 네타 있음
미술부 부장 에이겐지를 필두로 주인공 유이토, 주인공의 소꿉친구 요시미, 신입 후배 란으로 구성되는 미술부원 4명과 우연히 발굴한 안드로이드 간호로봇 스우를 포함한 5명은 미술부의 여름 합숙을 떠나게 된다. 곧 은퇴하는 선배의 송별회를 겸하여, 대회 실적이 나지 않아 깎여버린 부 예산을 고려한 합숙 장소는 학교의 합숙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영원할만큼 길었다. 이는 실제로 그들의 일주일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특정 기간, 데자뷰, 이러한 소재는 언뜻 보면 쿠사리히메(플레이하지는 않았지만)나 크로스 채널과 유사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 실제로도 그러한 작품들과 상당히 비슷한 전개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 작품을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은 오직 루프라는 소재 하나밖에 없으며, 각 작품이 지향하는 목표가 판이하게 다르다.
'사상' 을 지향하는 쿠사리히메나 '인간'을 지향하는 크로스 채널과는 달리 판도라의 꿈은 시나리오 자체보다는 시나리오를 보조하는 각종 연출이 돋보인다. 루프,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유클리드 기하와 비유클리드 기하의 공준, 그러한 소재들이 한데 빚어진 본작의 시나리오에 담겨있는 가치는 직관적으로 읽어내기 어렵다기보다는 '없다'에 가깝지만, 플레이어의 시청각적 공감을 유도하는 연출 기술은 그래픽 기술이 괄목할만큼 발전해버린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단조롭고 유치해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퀄리티가 높은 작품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정적인 소재와 대비되는 역동적인 일상을 표현하는 각종 이펙트, 장면에 곁들여지는 클래식 곡같은 연출들은 본작이 한 편의 '연극'을 만드는 것이 주된 지향점이기에 플레이어로 하여금 한 발 물러서서 본작을 차근차근 관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문제는, 본작이 여러 면에서 좋은 야겜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에 있다.
우선 선택지 부재의 문제를 지적한다. 본작에는 많은 선택지들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를 제외한' 모든 선택지는 게임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선택지의 반복일 뿐이다. 이런 선택지들은 플레이어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판치라나 엿보기 등 이른바 '모에 이벤트' 로 불리는 이벤트를 출력하기 위한 용도이며, 나는 이런 선택지들을 시나리오게에서는 특히 자제해야 하며 시나리오의 질을 떨어뜨리는 '암적인' 선택지라 부르고 싶다. 본작에는 암세포들이 너무나 많아서 플레이어로 하여금 연민까지 느끼도록 만들지만, 시사하는 바는 분명히 있다. 초기적인 야껨들은 크리에이터에게 있어서도 유저들에게 있어서도 단순한 욕망의 배출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질 낮은 동인게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 했지만, 각종 스크립트 툴의 등장으로 진입 장벽이 낮아져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블루 오션의 문을 두드렸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비주얼 노블로 인해 야겜에서도 텍스트의 힘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로 KEY의 작품들에서 출발한 본격적인 나키게, 텍스트 인플레이션이 유행을 타기 전까지는 그저 포르노로서의 야겜의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시나리오를 약간 곁들인 정도의 작품들이 많았으며, 본작은 그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본작을 통해 원화의 발전이 불러온 모에게 열풍이 일기 전에 있었던 모에게의 프로토타입이 어떠했는가도 관찰할 수 있다.
작품이 잃어버린 방향성은 더욱 더 큰 문제이다. 본작은 구성적 면에서도 연출적 면에서도 짙은 연극적 색채를 띠지만, 보통의 야껨들이 무릇 그렇듯이 개별 루트 또한 존재한다. 각 개별루트는 루프 주기에 맞추어 한 루트씩 배정되며 이야기는 히로인이 가진 트라우마나 의외의 반전 등 큰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을법 한 무거운 소재를 바탕으로 진행되지만, 루트당 150KB라는 적은 분량으로 너무나 많은 시도를 했다. 히로인을 공략하면서, 루프의 진상을 파헤치려 하고, 아무런 이벤트 없이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또한 일상은 메인스트림에 융화되지 못 하고 유리되어 있다. 어느 쪽에도 집중하지 못 해서 결과적으로 이야기의 밀도가 너무나 낮기에 히로인 루트는 각자의 색을 지닌 이야기로 거듭나지 못 하고 포르노적 목적으로 귀결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본작이 전연령 게임이었다면 더 좋은 평가를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하나의 소재로서 트루 엔딩이라는 목적을 위해 희생된다. 이야기가 별 재미가 없다는 정도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본작은 루프라는 소재를 메인으로 하는 작품이며 여기에는 모에게들이 간과하고 있고 메타게임들이 신랄하게 비판한 야껨적으로는 상당히 위험한 사상을 담고 있다. 시나리오라이터 본인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본작에서는 그 누구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한 이를 표면화하는 동시에 침묵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비판 없이 널리 수용된 모에게의 프레임을 1차적으로 만들어내고 방조한 크리에이터들은 본작의 크리에이터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본작이 놓친 것은 게임성과 이야기의 중심축 뿐만 아니다. 감동을 인위적으로 조장하려는 감상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이유의 상실 또한 감상을 흐리는 주요한 요인이다. 사건의 전개와 발생에는 납득이 갈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작품의 사건들에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복선)과 모순이 없는 설정을 필요로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싼 감동을 조장하려 임기응변으로 설정을 창조하곤 한다. 그리고 그 설정들은 대개, 플레이어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 하도록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다. 다행히 본작은 스스로 설정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모순행위를 저지르는 수준까지는 다다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는데, 스스로의 비극성만을 계속하여 강조할 뿐 플레이어를 충분히 납득시켜 자연스레 감동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텍스트량이 부족하여 배경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량이 현격히 부족하며, 특정 장면을 각종 연출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싼 눈물을 흘리게 하려는 노력밖에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한 장면에 감동을 했다거나, 눈물을 흘린 플레이어는 반드시 이야기의 앞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흘린 눈물은 오류가 없는, 흘릴만 한 가치가 있는 눈물인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논리성을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작품이긴 하지만, 뉘앙스가 잘 전해지는 타이틀과 연결되는 이야기의 구조미는 여전히 아름답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닫았을 때 상자 안에는 희망이 남아있었지만, 판도라의 꿈상자를 열었다 닫았을 때 안에 남아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본작은 그 물음에 대해 열린 채로 이야기를 마무리짓지만, 그것이 똑같은 무게를 지닌 희망이었으리라 생각되기는 한다.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마츠츠미 / 분위기 게임의 명암 (0) | 2016.08.11 |
---|---|
손때 투성이 천사 (0) | 2016.07.31 |
플라네타리안 (0) | 2016.07.01 |
여름의 사슬 / 이름과 상징 (0) | 2016.07.01 |
죄의 빛 랑데부 / 어렴풋이 보이는 minori의 색 (0) | 2016.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