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타이틀 : CLOCKUP / 夏ノ鎖
발매일 : 16.03.25
장르 : 그레이 ADV , 납치 감금 능욕 ADV
원화: 노리자네
시나리오:아소 에이


* 네타 있음








며칠 전 일본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어떤 사건이 그 나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성실하고 똑똑하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고 있던 한 대학생이 중학생 여자아이를 2년동안 납치하고 감금했다는 것이다. 진상이 확실히 밝혀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 없이 자유 의지를 박탈하고 자신의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화하는 유괴 및 납치 사건은 피해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들에게 지속적인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악질 범죄 중의 하나이며, 특히 아동이나 젊은 여성이 그 대상이 되었을 경우에는 단순 납치 뿐만 아니라 피의자의 의도에 따라 성범죄 등 2,3차적 범죄로 확장되는 경우 또한 잦기에 자연스레 공분이 가득 담긴 사회적 시선이 향하게 된다. 멀리 나가지 않고 국내만 바라봐도 여러 끔찍한 유괴 살인 사건들이 있었고, 약 30년 전, 같은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도 여고생을 대상으로 한,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 수법이 끔찍했던 유괴 살인 사건이 있지 않았는가? 계획적이고, 장기적으로 이어지며, 그 결말이 상당히 잔혹하다는 유괴 및 납치 사건의 보편적인 특징들로 인해 '유괴 및 납치' 의 범주에 속하는 범죄들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그만큼 대중들의 기억에 공통된 끔찍하고 추악한 이미지로서 오랫동안 남아 있고, 그 때문에 사실 여부나 피해의 정도를 떠나서 단순히 발생했다는, 그 피의자로 지목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면죄부를 받기가 쉽지 않게 된 것은 분명하다. 



공교롭게도 이 夏ノ鎖 라는 작품은 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바로 며칠 전에 발매되어 그 절묘한 타이밍으로 인해 이목을 끌었는데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트위터 등에는 관련 사건과 작품을 연관지어 우려하는 글들이 여럿 있었다.) , 그런 영향도 있고, 본작은 클락업의 전작들처럼 반인륜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철저한 1:1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이 전작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점에서 플레이어를 상당히 피곤하게 만드는 물건이었다. 속사정이 어떻든, 일차적으로 보면 유괴 가해자와 피해자가 좁은 공간 속에서 서로 피할 길이 없이 서로의 감정을 마주쳐야 하며, 그 요동은 고스란히 플레이어가 받아들여야 하는 몫이니까 말이다. 과연 플레이어는 정신분열과 흡사한 증상을 보이는 또라이같은 주인공에게 몰입하여 가학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할까? 아니면 피해자인 히로인에게 몰입하여 끝나지 않은 신체적, 심적 고통에 시달려야 할까? 극단적인 두 선택지를 내어 놓고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하라는 것은 중도파의 입장에서는 참 쉽지가 않은 선택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본작을 플레이하며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며 망설여야 했고, 또한 본작이 그리는 무서울만큼 현실적이고 배려가 없는 납치 감금의 묘사, 서서히 에스컬레이트되는 가학성의 생생한 반영으로 상당히 공포에 떨었고 속이 아주 쓰린 채로 플레이를 해 나갔다. 









그런데 본작이 품고 있는 공포의 양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면,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쉽지는 않았지만 본작에는 두 가지 형태의 공포가 혼재하고 있다는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다양하게 나눠볼 수 있겠지만, 작품 내부에서 보자면 미즈키가 느끼는 공포 - 신지가 느끼는 공포 /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피학성에 대한 공포 - 가학성에 대한 공포 / 테마적으로 보자면 폭력성에 의한 공포 - 신지가 스스로 겪는 실존에 대한 공포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테마이리라 생각하며, 여러 생각을 한데 묶어내기는 어렵겠지만 차근차근 정리해보고자 한다. 본작은 우선 소재나 표현에서 느껴지는 표면적인 공포심으로 시작하고 주를 이루며, 다른 하나는 본작의 테마와 직결되는 '본질적인' 공포에 대한 것이다. 이는 화면 너머에 있는 플레이어의 내면을 사정없이 도려내는 실체가 없지만 무엇보다 큰 공포이며, 어느 새 납치, 감금, 능욕으로 대표되는 본작의 자극적인 요소들을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실질적인 본작의 군림자가 되어 있다. 



우선 아소 에이라는 시나리오라이터를 살짝 들여다보면, 이미 'サク詩' 를 통해 메인 시나리오라이터였던 스카지보다 '상징'을 능숙하게 이용하는 작가적 능력을 보였었는데, 상징적 표현이나 상징물이라는 것이 플레이어들이 단번에 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여 재미를 느끼기 쉬운 부분은 아니지만, 작가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상징을 이용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플레이어들이 작가가 의도한, 상징의 기표 속에 녹아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적절한 비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감탄하며 상징의 의미를 감미롭게 음미할 수가 있으며 거기에서 값싼 웃음이 아닌 경외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즐거움이 탄생한다. 적절한 비유 대상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상징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은 천부적이거나 혹은 엄청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며, 매우 괄목할만한 작가적 능력이고, 수준 있는 라이팅 스킬인 것이다. 본작 또한 작가의 상징의 이용이 매우 돋보이는데, 이 상징들은 또한 구조적으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첫번째로, 표면적인 공포의 방식을 대표하는 바이올린은 미즈키의 자아가 담긴, 어쩌면 미즈키의 존재의 대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중요한 대상으로 표현되는데, 물리적 폭력이 아닌 상징의 파괴 위협에 따르는 긴장감의 지속과 개인의 정신이 무너지는, 존재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상징의 방법을 이용해 가장 치명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기도 하며, 가끔은 희망을 노래하는 양면성을 지닌 상징으로서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그 어느 매체도 아닌 오직 야껨만이 그릴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며 시나리오적 시도이다.



미즈키에게만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실체가 있는 물질적 상징을 이해하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그 아랫층에 있는 상징으로서 '이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를 요구받는다. 이는 신지와 미즈키 양자에 모두 의미가 있는 상징이며, 두 명은 이름을 통해 연결된다. 또한 이름이라는 사슬은 다음 상징으로 나아가는 근거를 제시한다.


美月。
お前がその尊厳を、その心を、保ちつづけている限り、俺はお前をその名で呼ぼう。
だが、お前の気高い精神が、完膚なきまで叩き潰されたそのとき。お前は人生と名前を剥奪されるのだ。
なあ、美月――
お前を、生まれ変わらせてやる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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だが今は、名前で呼ぶ必要はない。こいつはただの俺の道具であり、呼ぶ時は『おい』だけで済む。


미츠키.

네가 그 존엄을,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한, 나는 너를 그 이름으로 부른다.
하지만, 너의 고상한 정신이, 완전히 박살나버린 그 때, 너는 인생과 이름이 박탈된다.
자, 미츠키ㅡ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해 줄게.
====>
하지만 지금은, 이름으로 부를 필요는 없다. 이 녀석은 단순한 나의 도구이며, '어이' 정도로 부르면 된다.



"まだ……ニュースは……俺の名前……は出ないのか……今、白井の名前……美月じゃない……白井の家に、不審者が侵入した……そうだ……それは俺だ……"
====>
"美月……お前にもう姓は必要ない。お前はただの美月だ。お前は、俺と一緒に生きていくしかないんだ。"

아직.. 뉴스에.. 내 이름은.. 나오지 않는건가.. 지금, 시라이의 이름.. 미츠키가 아닌.. 시라이의 집에, 수상한 사람이 침입했다고.. 한다.. 그것은 나다..
====>
미츠키.. 너에게 이제 성은 필요없다. 너는 단순한 미츠키다. 너는, 나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




"美月は、俺の名前を呼ばなかった。単なる初対面の他人としてしか、俺を認識しなかった。"
"でも、俺は……俺はなぁ……。""くそ……くそ……"
<====>
"所詮、名前などというものは、自分が望む望まざるにかかわらず、親に勝手につけられるものだ。だから、俺は、自分の名前に、愛着もなければ、執着もない。"

미츠키는,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단순한 초대면의 타인으로밖에, 나를 인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나는 말이야..
젠장..
<====>
결국 이름따위는 자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간에 부모에게 마음대로 붙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이름에 애착도 없고, 집착도 없다



①은 이름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이름이라는 약속된 기호를 통해 소통을 이루어나가며, 대상을 인식가능한 범위에 두기 위해서 보고 느끼는 모든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타자에 의해 태어난 정체성은 각 개체들에 있어서 존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되며, 의미 작용의 근거가 된다. 본작에서는 단칸방의 지배자로서 명명권을 가진 신지의 의도에 따라 미츠키의 이름이 시시각각 변해가며 여기서는 시라이 미츠키가 시라이 미츠키라는 고결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상황 하에서만 시라이 미츠키로 부르고자 하는데, 외압에 의해 자기를 유지하는 정체성이 파괴된 순간 존재를 결정하는 이름을 앗아가고자 한다. 실제로도, 자기의 성질을 잃어버린 대상과 소통함에 대해서는 상실 이전에 갖고 있던 이름을 통해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계란//닭의 알 , 계란//계란 프라이 사이에는 다양한 유사성은 존재하지만 그 본질은 이미 변해버렸으며, 동일한 '계란'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본질적인 의미 작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②는 성과 이름의 구조에 대해 물음을 제시한다. 보통 사람의 이름이라고 하면 성을 포함한 Full name을 가리키는데, 성과 이름이 떨어져버린다면 그만큼 애매한 본질을 가지게 된다. 본작에서는 '성'이 사회적 존재로서 기능할 수 있는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보는데, 미츠키는 '시라이' 라는 성을 가지기에 시라이가의 시라이 미츠키라는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그 성이 말소됨으로써 사회적 결속이 끊어지고 '미츠키' 라는 애매한 정체성만을 가지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회적 결속은 마지막 남은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최후의 끈이며, 이에 대해서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존재를 파괴하려는 시도에 이어 본질을 흐리는 방식으로 존재를 망가뜨리며 예종시키는 방식을 고안해내는 신지의 악랄함을 찾아볼 수 있다.



③은 신지의 자기에 대한 물음을 제시하며 다음의 상징으로 이어지는 힌트가 된다. 개명같은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사람의 이름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주어지게 되고, 그 이름에는 자기의 소망이 아닌 타인(부모)의 소망이 담겨 있으며 그로부터 정체성이 태어나고, 존재가 정립된다. 신지는 그 정체성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라 치부하는 듯 하지만, 이는 미츠키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 하는데서 받은 충격에서 비롯된 공황상태에서 나온 반동에 가까우며 신지는 이미 자신의 이름에서 태어난 존재적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全ての音が、制止し、何も聞こえない世界の中に、俺はいた。
遠いはずのその彼女が、そのまなざしが、俺の姿を、はっきりと映し出している。
見つかった。見つかったのだ。俺が、女子更衣室から出たところを、彼女に――
白井美月に、見られた.

모든 소리가 멈추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계에 나는 있었다.
멀리 있는 그녀가, 그 눈빛이, 나의 모습을, 확실히 비추고 있다.
보여졌다. 보여진 것이다. 내가, 여자 탈의실에서 나온 장면을, 그녀에게
시라이 미츠키에게, 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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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れを見られたわけじゃなかったんだな。光の側に立った白井の方から、影になった俺の姿は見えなかったんだな。俺の勘違いだったんだな。自意識過剰なだけだったんだな。

목격된 것이 아니었다. 빛의 측에 서 있던 시라이로부터, 그림자가 된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착각이었다. 자의식 과잉이었을 뿐이었다.

신지가 저지르는 일련의 행동은 철저히 계산적이고 필연적인 듯 보이나 사실은 우발적이었고, 계획부터 실행까지 옮기는 데는 엉성한 면도 많이 보였다. 꼭 범죄의 대상이 미츠키였을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하게 미츠키가 대상에 적합한 타겟이 되어 버렸고, 더군다나 신지가 생각하기에는 미츠키에게는 다른 여성에게는 없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신지의 어두웠던 세계에 빛을 넣어버린 상대가 미츠키였던 것. 신지는 자신의 치부를 미츠키가 목격했다고 믿었고 이는 계획을 진행하게 되는 강한 동기가 되었다. 그 동기는, 미츠키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고 자신을 알아주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미츠키가 실제로 작중에서 신지를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 했고, 그녀의 세계에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다. 신지는 이렇듯 그 누구보다 자기애가 강한 부류에 속하는 인간이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왜 신지는 미츠키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데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가? 단순히 자신을 위협하는 그런 괘씸한 짓을 벌이고도 모른척 하냐는데서 우러나는 분노인가? 아니면 자기애에서 비롯된 정복욕이나 과시욕에 따랐을 뿐인가?






この先、この世界で何が起ころうがもう関係ない。知ったこっちゃない。
俺は、俺の世界へ戻る。あそこだけが、俺を受け入れてくれる。あそこだけが正常なのだ。
だから俺は、戻る。絶対に戻るんだ。あの地下室へ。あの絶対安全な世界へ。
美月だけがいるあの世界へ。

이후에는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아무 관계가 없다.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간다. 저기만이 나를 받아들여준다. 저기만이 정상적이다.
그러니까 나는, 돌아간다. 절대로 돌아간다. 그 지하실에. 그 절대안전의 세계에.
미즈키만이 있는 그 세계에.

だがこれまでの愛想笑いは、卑屈さの浮かんだ失敗作だった。だが、これからは違う。これからの俺は、これまでの俺じゃない。この世界は偽なのだから、俺はいくらでも偽れる。笑顔くらい、いくらでも作ってやる。
俺は遂に手に入れたのだ。美月と二人きりの、鮮やかな色彩に包まれた本物の世界を

하지만 지금까지 지어왔던 거짓 웃음은, 비굴함이 보이는 실패작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앞으로의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아니다. 이 세계는 가짜이기 때문에, 나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미소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주자. 
나는 결국 손에 넣었던 것이다. 미즈키와의 두명이서의, 선명한 색채에 싸인 진짜 세계를.


본작의 사건들은 우발적 범죄이긴 하나, 단순히 분노에 따른 우발적인 행동들은 아니다. 신지는 과거에 미츠키에 대한 오해로 인해 받았던 신선한 충격을 재현하여 자신의 회색빛이 가득한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는 미츠키를 자신을 바꿔 줄수 있는 유일하고 특별한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는데, 때문에 가해자-피해자였던 신지-미츠키의 관계는 나약한 한 인간과 절대자라는 정반대의 일방적 관계로 역전된다. 여기서 이름이라는 상징은 이제 신지에게만 해당되는 상징인 '미츠키' 로 이어지며, 표면적인 공포였던 유괴 감금의 잔학성은 모든 상징들과 함께 신지의 실존에 대한 고뇌로 최종적으로 통합된다. 즉, '인물' 미츠키가 아닌 '상징' 미츠키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에서 '인물' 미즈키는 더 이상 별다른 타자로 고려되지 않고, 자신이라는 타자로서의 상징을 띠게 되므로 물리적 가학과 성적 요소에서 어떤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그보다는 신지의, 플레이어의 멘탈리티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진정한 공포가 시작된다.



본작에서는 그 과정을, 절대자에게 기대어 자신의 본질을 알아나가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고독한 싸움으로 그리며 여기서, 또라이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해왔고, 그에게 공감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나는 어느 새 신지를 자신을 수양하는 고단한 수행자로 바라보며 동정하고 있으며, 그의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그 자체가 끝없는 공포의 근원이 된다. 결과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신지라는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지만 또한 자신을 끔찍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이 주어진, 고통의 굴레를 걸어갈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 끔찍한 자기애는 미츠키라는 다채로운 빛조차 떼어낼 수 없는 영겁의 쇠사슬과 같고, 본작은 그에 마땅히 한 인간의 다양한 파멸이라는 결말들을 대체로 제시한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행복해진다는 선택지는 없지만, 각기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는 결말들은 반복적이고 무의미하지 않으며, 모든 가정을 제공하기에 하나의 야껨으로서는 부족함이 없고 높은 완성도와 만족감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사슬' 이라는 상징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상징이 통합되기 이전의 의미는, 미츠키의 신체를 구속하는 야만적인 도구, 그리고 미츠키와 신지를 연결하는 '이름' 이라는 사슬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통합된 이후의 사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본작에서 정의되는 사슬이란 미츠키를 구속하는 도구가 아닌, 그 사슬을 벗어던지기 위해 발버둥치며 괴로워하며 결국엔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신지의 혼을 구속하는 형벌 도구가 아닐까, 그런 의도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재고해보면 물리적인 사슬과 정신적인 사슬이 매여진 두 사람이 사슬이라는 공유점을 통해 교감한다는 이미지 또한 그려진다. 



정리하자면, 본작은 상징으로 시작해서 상징으로 끝나는 작품이며, 상징들을 시나리오로서 한데 잘 묶어낸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렇게 매끄러운 사슬로 이어지는 상징의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구조미 또한 잘 느껴진다. 클락업의 작품들은 순간에 대한 포착력이 돋보였으며, 무너져버린 일상과 극한에 몰린 인물들이 자연스레 드러내보이는 본성에서 느껴지는 추악하면서도 동시에 인간미가 한껏 담긴 고결함, 그 짧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쉽지가 않겠지만, 놀라울만큼 그 순간을 잘 포착해내고, 순간을 야껨적으로,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본작 또한 그러한 재주의 산물이며, 진솔하게 심금을 울린 멋진 작품의 하나로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