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타이틀 : CLOCKUP / Maggot baits
발매일 : 15.11.27
장르 : 고어, 스플래터, 느와르
원화: 하마시마 시게오
시나리오: 쿠라시키 타츠야, 크리스(H신 전담)



* 네타 없음




높은 대중적 인지도와 평가, 리마스터, 문고판화, 애니메이션화 등 하드고어 장르의 에로게로서는 이례적으로 성공적인 전철을 밟았던 유포리아(2011)의 사례를 답습하며 클락업의 도전은 프라테르니테(2014)로 이어졌지만 완전한 실패만을 맛보게 됐다. 전작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즐비했지만, 그 요인 중 하나는 '이야기를 위한 소재' 가 아니라 '소재를 위한 이야기' 라는 본말전도의 오류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순애게' 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에서 에로신은 적재적소에 배치됨으로써 주인공-히로인간의 육체적 관계를 통한 정신적인 결속의 강화, 갈등 해소와 사랑의 재확인 등의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다크게' 에서는 무력한 현실에 굴복하는 좌절감, 인간성의 파괴, 끓어오르는 증오에의 근원 등을 표현하는 등, 에로게에서의 에로신이라는 장치는 그 자체로 서사적인 기능을 하면서도 다양한 행동 계기와 감정을 부르는 도구로서 결코 멸시해서도,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남발해서도 안 되는,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에로신이 전작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이끌어내지 못 하면서도 서슴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클락업의 세 번째 도전, Maggot bait는 전작에서 겪은 그러한 본말전도의 실패를 극복하기는 커녕 더욱 더 심화된 형태로, 아예 본작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로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특징인데, 우선 여기서 본작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부각된다. 
'소재와 주제의 전도' 라는 현상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되며 결국 '시나리오와 에로의 완전한 유리' 라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는 독자들의 역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의미한 시도이며, 가장 효과적인 표현 장치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신중한 고려를 포기한 채 내팽겨쳐버리는 행위로서 시나리오라이터가 이미 에로게로서 온전한 작품을 쓰기를 포기했다는 말과 진배없다. 시나리오 작가와 H신을 담당하는 작가가 구분되어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인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본작의 에로신이라는 것은 인과의 중추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단순 나열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 소재주의와 속물성의 정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본작의 유일한 배드 엔딩은 어떠한 이성적 가치도 느낄 수 없는 본작의 '소돔' , 퇴폐적이고 본능에 절여진 이야기이자 말 그대로 Maggot baits를 실현하는 저급한 부분으로, 시나리오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 넣은 건지, 특정 유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넣은 건진 모르겠지만, 시나리오라이터의 무책임에서 비롯된 '가치 없는 나열' 이라는 구성이 독자들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의 나열에 대해서는 에로신 뿐만 아니라 다양하지만 그다지 깊이가 없는 소재들의 피상적인 나열도 문제가 있는데, 기독교 신학, 마녀, 유토피아, 인식론적 의문, 현상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등 본작에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들이 등장하고 그러한 소재들을 충분히 탐구하여 이야기의 살을 채우는 데 활용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단순히 텍스트의 겉멋을 내기 위한 소재로 이용될 뿐이고, 이 또한 결국엔 여지없이 의미 없는 에로신으로 연결될 뿐이다. 

이 쯤에서 하차를 하는게 옳은 선택이었겠지만 '그래도 클락업이니까, 아직 보여줄 것이 있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갖고 본작을 좀 더 플레이해보았고, 그 믿음은 대체로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의미한 에로신의 범람이라는 문제점 다음에 제기된 것은 '진정성 없는 인물들' 에 대한 몰입의 불가능에 대한 문제이다.
본작의 주인공 츠누가 쇼고를 포함해서 그 어떤 인물도 내면에 대한 연속적인 성찰이 이뤄지지 않으며
(몇 명 정도는 인식의 각성과 실천에까지 이르기는 하지만, 그리 심도있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플레이어의 몰입을 거부하는 불연속적이고 파편화된 내재 인식의 흐름은 쓸 데 없이 장황하고 고지식한 문체와 결부되어, '진지함', 이라거나 '장엄함' 을 표현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본작 스스로를 '희화화' 시키며 가치를 깎아내려버린다. 어떠한 사상이나 특별한 목적도 없이 빈발하는 마녀들간의 전투들에서는 어떠한 감흥도 느낄 수 없으며(준비되어 있는 전투 씬은 총 175장(전체 2495장)이고 이펙트도 꽤 많지만,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대립을 다양한 장면과 이펙트로 그럴 듯 하게 포장만 해 놓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그 속에서 아무런 인간적 가치도 찾을 수 없다면 대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연신 독특한 영창을 반복하는 광신도의 개입은 그 존재 자체가 이야기 전개를 위한 도구-작위성-에 불과하며, 희화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본작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의 행동 근거에는 추호의 논리적 개입을 허가치 않으며, 이야기라는 구조 속에 녹아들지 않는 감정의 집합은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특히 플레이어가 가장 몰입할 수 있어야 할 츠누가 쇼고라는 주인공의 변덕은 가장 심각해서, 이미 겉잡을 수 없는 작위성의 덩어리와 일체를 이루며 플레이어의 갈피를 전혀 못 잡게 만드는 최악의 인물상에 가깝다.



이미 처참한 수준의 작품임은 틀림이 없지만, 대부분의 의미 없는 에로신들에 시나리오 분량을 대부분 투자한 것에서 비롯된 이야기의 급전개 현상을 매듭짓는 에필로그는 그간에 보여 준 인물들의 사상과 사건의 경과를 둘러보면 황당무계한 것이며, 작위성과 우연이라는 편의주의에 합승하여 이야기의 수준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결코 인간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더기를 위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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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깨끗한 일들, 아름다운 일들..

그것을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 쪽이었으니까..

아름답고 올바른 인간의 모습. 선의, 용기, 사랑, 상호 이해―그러한 아름다운 것들은、그것을 믿을 수 있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밖에 존재할 수 없으니까.


- 작중 대사


그래서, 진실한 인간성의 가치라는 것들을 본작에서는 티끌만큼이라도 정중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가?
단지 해야 할 일은 본작의 허식에 가득 찬 포장을 벗기는 일이었고, 
그 결과로서 얻은 해답은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태하지 못 한 Maggot들의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느낌 있는 OP곡과 무비는 본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부분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올 클리어 후 되돌아보니 본작이 느와르적인 분위기만 살아있는 3류 스플래터 작품이라는 것을 OP무비를 통해 대변하는 것 처럼 보여서 영 찝찝한 여운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