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타이틀 : minori / 罪ノ光ランデヴー
발매일 : 16.02.26
장르 : 인터랙티브 노벨
원화: 유즈나 히요, sata, 미즈노 사오, 유우키 타츠야, 나카다 류미
시나리오: 하나미다 히카루, 츠테노 테츠, 미쿠리야 미쿠리, 미사기

- 네타 없음


새로운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minori가 벌써 다섯 돌을 맞이했고 올 해도 어김없이 그들의 작품을 선보이러 돌아왔다. 실제 기간으로 치면 약 3년 반 정도가 지났을 뿐이지만 작품의 넘버링은 어느덧 4. 캐러게나 가벼운 일상을 다루는 에로게가 아닌 시나리오의 힘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브랜드들은 적어도 1년 반, 길게는 몇 년에 걸쳐서 작품을 발매한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1년에 한 작품을 발매하는 minori라는 브랜드는 유례없이 짧은 발매 텀을 자랑하는 몇 안되는 브랜드로서 그 개근의 의지는 에로게 공무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줘도 아깝지 않다. 필자를 포함한 브랜드 팬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작품을 비교적 자주 만나볼 수 있으니 즐겁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과거작의 주박에서 벗어나서 한층 더 도약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그들이 채택하고 있는 안정적인 제작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제작 기간을 연장하여 좀 더 도전적이고 모든 개인의 주관을 만족시키는 명작을 탄생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기대는 이번에도 대체로 충족되지 못 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작품은 해가 지날수록 발전하고 있고, 이번 작품에서도 작년의 시도를 발판으로 한 걸음 더 내딘 부분이 있다는 성과를 나름 엿볼 수는 있었다. 이는 물론 한 걸음 퇴보한 부분도 있다는 얘기지만, 동일한 부분이 아닌 전혀 다른 영역에서의 걸음이므로 본작은 요리노를 포함한 다른 이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작품으로서 빚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본작에는 전작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형태의 감동이 있지만 정돈된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달까.

가장 주목할 점은 그들이 고집하던 '설정'을 버렸다는 점. 夏空のペルセウス에서는 아픔을 전이하는 능력을 주요 소재로, 12eve나 ソレヨリノ前奏詩에서도 주인공이나 히로인이 갖고 있는 특별한 능력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재의 사용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참신한 이야기에는 참신한 소재가 있지만 참신한 소재로부터 꼭 참신한 이야기가 탄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재가 높은 가능성을 갖고 있더라도 그 소재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해서는 작가의 소재에 대한 철저한 탐구가 필요하며, 소재의 늪에 빠지지 않는 중립성을 항상 유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능력같은 특별한 소재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작가는 작품 내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인간 내면의 감정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 작품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인, 독자들의 비판에 대한 응답을 요구받을 때는 입장이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점이 위험하다. 이는 필자의 사견일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평범한 이야기라면 '재미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더라도 소재의 늪에 빠져버린 작품을 평가할 때면 '재미 없는'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품은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해야 하며 작가의 패러다임의 변화와 발전을 유도해야 한다.

아무튼 본작은 지난 4년동안 작품에서 사용했던 '설정'과 그에 대한 의존적인 태도를 과감히 버렸다. 원래 안고 있었던 기대대로라면 이런 변화 하나로만도 작품의 수준이 한 단계 도약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아쉽게도 다른 부분에서 엇나가버리며 예상대로는 되지 않았다. 설정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赤い蝋燭と人魚라는 동화이며 본작의 이야기와 어느 정도 닮은 면이 있고 이야기의 핵심까지는 침범하지 않기에 바람직한 인용의 예로서 나쁘지 않았지만, 그들의 로우 리스크-로우 리턴을 바라는 태도는 전작들에서의 차용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ef부터 시작되는 설정의 차용은 그들의 작품의 표본이 늘어갈수록 빈번해지고 있으며 작품의 originality는 새로운 작품이 계속해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점차 손상되어가고 있다. 이는 신규 유저들에게는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기존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브랜드에 대한 매너리즘을 불러일으키며 브랜드 스스로 작품 감상의 비교 대상을 자신들의 작품으로 한정되도록 만든다. 결국 각 작품은 개개의 고유한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고 새로이 정립되는 작품들간의 공통성이라는 가치가 태어나기에 독자들은 해당 작품들에 대한 줄세우기가 가능하게 된다. 그 공통성은 '재미' 라거나, '감동' 이라거나, 그 외에 독자들의 다양한 1차적인 감상의 결과가 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한 작품은 어떤 작품의 아류작으로 평가받게 되고, 무의미한 순서 맞추기가 시작된다. 작품의 고유한 가치는 존중받아야 하기에 평가의 얕은 기준점이 생긴다는 것은 영 달갑지 않은 현상이며, 이를 유발하는 요인 중의 하나로 작품이 채택하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본작의 전개 방식은 전작의 형태와 매우 닮아 있으며 지양했어야 할 이러한 유사성을 굳이 채택했다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인터랙티브 노벨 형식에 대한 강박이라고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전연령 대상의 매체로의 도전이 아니더라도 에로게라는 틀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는 수구적인 태도는 이미 브랜드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졌는지도 모른다.



(동화의 내용은 가끔씩 인용되지만 네타적 소재는 되지 않는다)

비록 기존 유저의 입장에서 볼 때 작품의 신선미는 떨어질지라도 본작이 표방하는 테마성은 명확하며, 그들의 대표작인 ef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상의 유발 수단은 두 작품이 판이하게 다르다. ef가 이야기 속에서 독자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면, 츠미데브는 직접적인 언급이라는 다소 강제적인 수단으로 독자의 감상을 촉발한다. 교훈적일지는 몰라도, 다양한 즐길거리들이 테마성이라는 이름 하에 매몰되는 이야기는 그리 좋은 이야기라고는 보기 어렵다. 또한 다소 우연적인 사건들에 의해 이야기가 이끌려간다는 것에서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 연속성과 정합성을 근거로 하는 텍스트 게임에서 발생하는 우연에는 필연에 한없이 가까운 보완이 필요하며, 사건에 수반되는 감정의 절절한 묘사를 제공해야 독자들을 충분히 납득시키고 이야기에 매료시킬 수 있지만 본작에서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전작에서 볼 수 있었던 멋스럽고 감각적인 표현들의 실종은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 또한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그만큼 테마성을 강조하는 만큼 이야기가 테마로 연결되는 과정을 그리는 장면은 제법 감동의 여지가 있다. 각각의 루트는 과거의 문제로부터 비롯되는 현재의 갈등과 현재의 갈등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본작의 키워드인 죄와 빛의 연결, 그 연결을 통한 연속성의 추구라는 긍정적인 테마성은 본작이 테마에 대한 집중을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설정 의존적인 태도를 버림으로서 비로소 구현될 수 있었던 하나의 중요한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야기가 테마에 매몰됐다면 이야기에 속하는 캐릭터 또한 그 비극을 피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각 히로인의 행동에서 능동적인 의지 발현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 이유로 한없이 약한 내면이라는 것을 제시하며 강조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텍스트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비약적으로 이해해야 하지만 상당히 난해하다. 주인공과 히로인간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테마적 연결은 있지만 상호교류에 입각한, 현재에 충실한 일상을 효과적으로 그리지는 못 하니 단지 테마의 구현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으며, 오히려 능동적인 의지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더 잘 드러난다. 비록 전작에서 보여준 빛나는 조연들의 활약은 본작에서는 잠잠하지만, 각각의 서브캐러의 매력은 메인 히로인으로서 어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공략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불완전 연소된 채로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minori의 작품들은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으로 즐기는 편이기에 굳이 그런 쪽에서 비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조연으로서 충실한 역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공략도 불가능한 이도저도 아닌 서브 캐러의 취급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제한해버리는 게임들의 자유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조연의 중요성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만큼 에로게에서도 모든 캐릭터에 대한 조명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본작은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모든 캐릭터를 아우르는 이야기로 발전하지 못 하고 주인공과 히로인의 1:1의 이야기라는 지루한 장면으로 대체된다. 이 또한 안정적인 제작 프로세스를 추구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것이다. 


(아쉽게도 매력적인 서브 히로인들의 활약을 제한하고 있다)


연출계의 대가인 minori답게 CG나 연출 방면에서는 무어라 특별히 언급할 내용은 없지만, 요리노에서는 아름다운 표현과 풍부한 내면 묘사를 강점으로 내세우며 감상을 자극한다면, 본작은 테마와 연결되는 적절한 CG 연출을 바탕으로 감상을 자극한다. 요리노가 에스프레소라면 본작은 라떼아트를 그려놓은 커피랄까. 그들의 강점은 아무래도 뛰어난 그래픽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니, 자신들의 장기를 잘 살린 것이 돋보인다. 음악은 OP와 함께 각 히로인 ED까지 총 4곡이 준비되어 있는데, 본작은 minori의 전작들과 달리 이야기적으로 한 히로인에 편중되지 않는 밸런스를 잘 잡으며 각 히로인에 대해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각각의 히로인에게 준비된 곡 또한 그러한 배려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본작에 대한 아쉬움은 많고, 제 2의 XXX로 불릴만 한 색채 또한 고스란히 안고 있기는 하지만, 본작은 본작 나름대로의 색깔이 있고 시사하는 장점이 있는 만큼 그 장점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작은 인상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진 것은 아니지만, 가슴에 남는 일관되는 아름다운 가치를 안고 있는 작품이기는 하고, 그러한 특성은 본작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가치를 찾아서 작품으로의 여정을 한 번 떠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