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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nohi » 03

 터널에서 소녀를 만나고 나서 며칠 후――
 유우토는 봄방학의 어느 하루를 세리카의 집에서 보내고 있다.

「전혀 안 끝나……이젠 늦었어……」

 세리카는 울먹이는 얼굴로 찌푸리며 숙제의 산과 마주하고 있다.
 방학이 끝나기 직전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고 있던 세리카에게 기가 막히면서도 츠부라는 정답 맞추기를 해 나간다

「울 시간 있으면 한문제라도 풀어. ○×표 해주는 츠부라가 따라잡겠다」

「그치만……이만큼이나 과제를 내는게 이상하잖아!」

「과제 양은 누구라도 평등하잖아? 제대로 계획적으로 했으면 벌써 끝나있었겠지」

「츠부라랑 유우토는 치사하다……졸업한다고 숙제가 없다니」

「세리카. 유진도 밭일 끝나자마자 달려왔잖아?
세리카가 그러면 안되지?」

「유우토는 괜찮잖아. 어짜피 여친도 없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주체를 못하는걸테니까」

「유진은 애인이 없는게 아냐. 안 만드는것 뿐이지」

「아 좀 츠부라!」

 이 자매같은 흐뭇한 소꿉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보충을 하길래 무심코 반응해버린다.

「뭐, 이 마을에서 애인이라고 해도……」

 세리카의 아무렇지도 않은 군소리를 듣고 그 밤의 그녀를 떠올린다
 그 후로 한 번도 마을 안에서 만난 적이 없으니, 역시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몸을 휘저은 충격은 확실히 그림 속에 담아버렸지만.

 무엇보다, 덧없이 미소지으며 이쪽을 응시하는 모습과 맑고 투명한 상냥한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유우토, 히죽거리는거같은데」

「……기분탓이겠지」

「흐응~ 뭔가 좋은 일이 있었구만. 너한테 흥미없으니까 안 들을거지만」

「별로 상관없는데, 네 기대에 부응하는건 뭣도 없으니까」

「유진이 즐거운것 같으니 좋긴 하지만 계속 떠들고 있으면 세리카 숙제가 안 끝날거같애」

「그래그래. 정말이지, 방해할거면 돌아가」

「아, 그럼 돌아가야겠다. 부탁했던 가게보기는 니가 할거지?」

「자, 잠깐 기다려봐! 방금 했던 말 취소!」

 울며 웃으며 당황하느라 바쁜 세리카를 뒷전으로 하고 계단을 내려간다.

「유우토! 돌아가지마! 제발……」

 세리카는 대하기 편하고 바보같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고 울먹이는 세리카의 얼굴을 보니 무심코 미소가 흘러넘쳐버린다.

「안 갈거야.  가게좀 보러 가려고」

「엣……? 뭐, 뭐야, 그럴거면 그렇게 말하던가. 가버리는 줄 알았잖아……」

「슬슬 츠부라도 지쳐서 신경이 날카로워졌으니 고기만두라도 들고 올까 싶어서」

「흐응……알았어. 그럼 방에 가져와」

「예예」

 여자아이 두 명에 남자가 한 명. 
 이런 조합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데는 익숙해져 있었다.
 세리카를 여성으로 카운트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  *  *


 고기만두로 매우 기분이 좋아진 츠부라는 세리카와 함께 숙제를 능숙하게 정리해나간다.
 별로 공부에 자신있는건 아니었을테지만 후배의 문제집이니 간단한걸까, “가정교사 츠부라”를 즐기고 있다.

 전혀 손님이 오지 않는 잡화가게를 보는데 질린 유우토는
 세리카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매장에 있는 “ 감자 소프트 아이스크림 ” 을 훔쳐먹는다.
 맛있는건지 맛없는건지 판단할 수 없는 그 애매함에 중독된다.

「너무 먹으면 아줌마나 아저씨한테 죄송하니까, 이정도로 할까」

 숙제하는걸 도와주고 있었다고 얘기하면 얼마든지 주실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민폐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졸리다」

 수확한 지 얼마 안 된 오렌지를 책상 위에서 굴리다가 꾸벅꾸벅 졸아버린다.

 누가 오면 소리로 눈치챌 것이다.
 잠깐만 눈감아볼까.

「크레용」

「……핫!?」

「있나요」

「에……?」

 눈치채지 못 한 나의, 눈 앞에 사람이 서 있다.
 단번에 몸을 일으키며 응대한다.

「크레용이면 뭐든지 좋아. 유성이든 수성이든」

「음……여긴 아마 그런건 없을거에요. 넷 통판이면 쉽게 찾을 수 있을겁니다」

「그런가……아니, 넷에서 사면 되긴 하겠지만 살 수 있으면 여기서 사고 싶다고 생각해서」

「이 가게에 각별한 감정이라도 있으신가요? 대체로 넷에서 팔고 있는거랑 똑같고, 오히려 여기가 비싼데……」

「너……그러고 보니, 이 가게 사람 아니지?」

「네, 뭐, 그렇죠」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 보이는 그 여자아이는 속았다는듯 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당장 필요하면 제 크레용이라도 빌려줄게요. 요즘은 안 쓰니까 곧바로는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무슨 의미일까」

「당신도 이쪽 사람이잖아요? 다 쓰고 돌려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건 신경 안써. 그보다 지금 하는 말이, 내(僕)가 네 집에 들러야 하는 흐름이 되는것 같아서」

「ㄴ, 나……?」 (ぼ、僕?)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성의 집에 들어앉아서 그림도구가 발견될 때까지 기다린다는건……
 아무래도 나(僕)한텐 허들이 높은 행위니까」

 1인칭(僕)에 놀라며, 그녀와 어디선가 만났던 적이 없는지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 안에서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 한 사람이 있다는건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게 네 꼬드김이라면 생각해봐도 좋겠지만」

「하아……」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 해도 그녀의 페이스에 삼켜져서 만사 휴의다.

「없으면 어쩔수 없지. 너, 나 대신에 점주한테 답례좀 말해줘」

「전에 그림도구를 찾고 있었을 때, 우리는 갖춘게 적다고 하면서
 앵초로 만든 그림도구를 내게 준 적이 있어서, 몹시 감사하고 있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을 바꾸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줘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뭐, 크레용에 대한 걱정은 필요없어. 나도 갖고 있으니까」

「그럼, 부탁했으니까」

「엣……?」

 그 여자아이는 위세 좋게 단언하며 가게에서 나갔다

 처음부터 크레용을 살 마음은 없고 단지 반응을 시험해볼 뿐이었는가.
 그보다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에서는 본 기억이 전혀 없다.

 같은 학년이 아닌건 확실하지만, 그녀는 누굴까――?


     *  *  *


「하아……어떻게든 끝났구나-!」

「세리카, 우선 츠부라한테 고맙다고 해라」

「츠부라, 고마워요! 역시 친구밖에 없다니까!」

「향후는 좀 더 계획적으로 진행하도록」

「네-엣!」

「나한테도 충분한 답례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가게보기 잘 넘어갔네. 다음에도 또 부탁!」

「그것 뿐?」

「뭐 잘못됐어? 그치만 유우토, 가게 음식 맘대로 먹었잖아?」

「흠칫」

「내가 눈치 못챌거라고 생각하냐? 뭐, 유우토라면 분명히 한다고 생각했지!」

「아니 저건, 내가 오늘 오렌지를 가져와서, 물물교환을 하려고……」

「아아, 저거 유우토가 가져온거구나. 잘 먹을게」

「츠부라도 한 개 받을래?」

「좋아, 츠부라라면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수 없겠네……」

「고마워. 실은 유진이 만든 오렌지를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츠부라는 입가에 계획을 품은 듯 한 미소를 띄우며 양 손바닥으로 소중히 감싼다.

「소중한 사람한테 건네주고 싶어」

「소중한, 사람……?」

「우후훗. 두명한텐 비밀이야」

 세리카와 유우토는 얼굴을 마주보며 “ 혹시” 하고 기대한다.

「좋네! 유우토도 다행이구만, 가끔씩은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세리카는 여전하네」

「에, 뭐가?」

「유진, 고마워. 세리카도」

「응. 밖도 어둡고 하니, 돌아갈까」

「응」

 세리카의 집을 뒤로 하며 츠부라를 보내고 나서 돌아가는 길을 걷는다
 걸으면서, 그 오렌지는 부친에게 건네주는 것일 거라고 유우토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사이가 나빠서 두 명은 대화도 잘 하지 않지만, 음식으로 화해를 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츠부라의 아버지인 촌장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다행이다.

 비구름은 어디론가 사라져, 머리 위에는 밤하늘이 반짝이고 있다.

 오렌지를 땄던 이 손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미숙한 자신을 돌아보며, 유우토는 장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