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나도 국기

감상2021. 12. 30. 06:00

제작사/타이틀 : Purple / クナド国記

평점 : 2/10

* 스포일러 X




2034년, 자연발생한 '철귀'라는 거대 금속 생명체는 인류 문명의 근간이 되는 금속들을 무쓸모하게 만들고 일정 규모 이상의 인간 집단을 공격해서 기술과 문명이 단숨에 쇠퇴하고 인류는 소규모의 집단으로만, 생존을 위한 통제된 사회를 구축하여 살아가게 된다. 주인공은 2034년으로부터 대략 천년 후에 칸토라는 나라에서 깨어나는데, 이 나라는 자유경제, 민주적 사고같은 개념은 당연히 없거니와 연애, 친구, 가족같은 개념마저 철귀에게 공격받지 않기 위한 인구 통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모든 국민들이 쓰고 다니는 여우 가면은 이 나라가 개개인의 개성마저 존재하지 않는 디스토피아임을 상징한다. 언뜻 보면 SF 장르의 게임같기도 하지만 인류에게 발생한 '이능력'같은 설정을 보면 단순히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쪽이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설정들을 적당히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기도 하고.

이 겜의 감상 이전에 눈여겨볼 점은 발매 당일에 전체 게임 분량의 거의 절반을 포함한 체험판을 내놓은 것이다. 전체 텍스트는 2.5MB 정도 되는데, 체험판의 텍스트는 1MB를 살짝 넘는 분량이다. 웬만한 미들프라이스-풀프라이스 야겜 분량을 무료로 공개한건 굉장히 파격적이고, 무료로 볼 수 있는 구간의 이야기는 깔끔한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유저들의 게임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낮게 매긴 평점은 이것이 파격적인 시도를 가장한 마케팅일 뿐이었고, 유저들은 미카게의 네임밸류에 또 속았다는걸 의미한다.

'ef', '아마츠츠미' 같은 과거 작품들을 살펴보면 미카게라는 라이터는 순간을 묘사하는데 강점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minori는 업계 탑클래스의 영상미와 연출력을 가졌던 메이커였기에 미카게의 시나리오를 제대로 살릴 수 있었고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야겜의 가능성을 2010년대 이전에도 보여주었다. '아마츠츠미' 또한 미카게의 시나리오와 몽환적인 배경, 극적인 연출로 '분위기 게임'의 진수를 보여준 바가 있다. 또 하나의 강점은 양면성이나 페르소나를 가지는 캐릭터를 즐겨 쓰면서 캐릭터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점과 묘사를 제공함으로써 인간적인 가치를 최대한으로 끌어낸다는 점인데, 'ef'의 치히로, 유우코 / '소레요리노 전주시'의 하루카 등의 캐릭터성은 그런 방식으로 성립된다. 미카게의 강점들은 본작에서도 찾아볼수는 있었지만 일부를 제외하곤 좋지 않은 결과물만이 남았다.

사실, 미카게 유니버스에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애매하게' 그려진다는 이야기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종종 보이긴 했다. 그 단점들이 연출로 덮어진 것이지 근본적으로 해결된건 아니었고, 본작은 연출로도 커버가 안 될 만큼의 설정충 겜으로 완성된 결과, 너무나 애매하게 묘사되는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이해도 잘 가지 않고, 이야기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야기의 목적도 잊은 듯 남은 설정만 플레이어에게 쏟아내기 위한 쓸모없는 분량이 가득하다. 농밀한 묘사도, 그 횟수도 부족한 H씬은 이미 이 겜이 야겜으로서의 구실도 못 한다는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장점은 퇴색되고 단점만 부각되는 겜이 돼 버렸다.

하지만 이 겜이 처음부터 망가진건 아니었고, 분명 일부 루트는 이 겜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캐릭터성을 어떤 과장도, 소재주의적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불편함도 없이 플레이어에게 전달했다. 그렇기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설정에 잡아먹힌 이야기는 작가가 이야기의 방향을 조절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작가의 비범한 상상력의 산물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좋은 이야기는 이야기가 캐릭터와 설정을 이끌어가지, 캐릭터와 설정이 이야기를 끌어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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