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러브리체

감상2022. 2. 3. 00:45

 

제작사/타이틀 : SAGA PLANET / 金色ラブリッチェ

 

평점 : 6/10

 

* 스포일러 O

 

 

좋은 야겜이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는, 개성이 확고한 히로인들이 있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개성이 확고하다는 것은 그 캐릭터가 갖고 있는 단편적인 모에 속성들의 집합으로 플레이어의 취향을 잘 저격한다거나 하는 낮은 차원의 개성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갖고 있는 내면의 모습들이 서로의 연심을 촉매로 하는 이야기를 통해 역동적으로 발현될 때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캐릭터의 탬플릿 속에서도 그 캐릭터만이 고유하게 가지는 개성을 말합니다. 현실의 사람대 사람의 관계에서도 숨김 없이 서로가 서로를 대할 때 자연스러운 만남이 계속 이루어질 수 있듯이, 그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캐릭터는 플레이어가 받아들이기에 좀 더 매력적인 위치를 점유할 수 있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야겜에서 편의적으로 분류하던 캐릭터 게임이라는 장르에 속해있는 겜들은 좀 더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캐러게'라고 하면 무겁지 않은 유쾌한 분위기와 캐릭터성의 구현에 중점을 둔 장르의 겜이라는 인상을 받지만, 실제로 그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 하는 겜들이 많죠. '캐러게'라는 장르에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캐러게로 분류되는 겜에서 개성이 충만한 캐릭터를 찾지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수많은 캐러게들을 접하면서 장르에 대한 불신이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데, 본작 '금빛 러브리체-킨코이-'도 게임의 줄거리나 캐릭터 소개를 봐도 흥미로운 소재가 있다거나,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4명의 '금발' 히로인을 내세우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속성 모에라는 포인트만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였어요. 결과적으로는 '킨코이'를 플레이하면서, 비뚤어진 제 안목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캐릭터 게임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어떤 요소들이 좋은 캐러게를 만들까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볼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 테마와 캐릭터의 밸런스, 이항 대립 요소

 

'킨코이'의 캐릭터성 확립은 '테마로 완성되는 캐릭터 - 캐릭터로 완성되는 테마' 사이에서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금빛 인생, 골든 타임이라는 테마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각 히로인들과의 이야기에서는 그 테마를 고정된 한 가지의 의미로 상징해서 반복해서 되새기지는 않습니다. 아마 그렇게 설계된 이야기였다면 테마에 매몰된 캐릭터들이 그려진다는 인상을 받기 쉽겠지요. 본작의 테마는 각 히로인 루트에서 조금씩 다르게 차용되기에 유저들이 쉽게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끔 해 줍니다.

 

이야기의 전개는 주인공과 히로인의 사랑을 통한 연결에서 시작해서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 그 고민이 해결되고 서로가 손을 잡고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까지, 기존의 작품들에서는 기-승-전-결의 커브를 구현하기 위해 도입되는 큰 갈등을 유발하는 이벤트를 과감히 배제하고, 야겜의 필수 요소인 서로간의 관계와 사랑을 통해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에 집중하여 천천히 확장되며, 자극적인 이벤트 대신 이항 대립 구조를 골자로 하는 플롯을 제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캐릭터의 내면에 숨겨져있던 매력이 발산되고 아름다운 게임 구조를 가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킨코이'에서 보이는 이항 대립 요소는 주로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서 기인합니다. 대립되는 두 단어를 정의하면 '평범함'과 '특별함'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게임의 시작부터 평범한 학원물의 클리셰를 살짝 비튼, 노블 학원이라는 엘리트 학교에 주인공이 입학하게 되면서 시작되죠. 그곳에서 '서민'과 '귀족' 이라는 태생적 환경의 차이로 인해 겪는 곤혹과 그 해결 과정은 그저 '폼나게' 살고 싶다는 주인공의 대략적인 캐릭터성을 제시합니다. 나아가서 각 히로인 루트에서는 '멈춰 있는' /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요소의 대립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 대립 요소의 합으로 제시되는 형태가 본작의 캐릭터들이 고유한 캐릭터성을 가지도록 하는 중요한 포인트이고, 본작에서 가장 감명깊게 감상한 부분이었는데요.

 

주인공 오로는 작중에서 대체로 '멈춰 있는'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폼나게' 살아보려다 한 번 실패를 겪었고 과거에 대한 후회를 안고 있는,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에 어울리는 타입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본작에서는 주인공이 히로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과거를 이겨내는' 성장의 형태를 그리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현실에 순응하고 다른 대안을 찾음으로써 주인공 자신이 히로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주는' 형태의 성장을 이루도록 하는데, 공통 루트까지의 이야기가 테마가 캐릭터를 만들었다면, 개별 루트에서는 캐릭터가 테마를 만드는 국면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공통 루트까지의 주인공은 기존의 야겜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영웅적인 주인공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요. 그 행동의 근거에는 대화중에 우연히 듣게 된 본작의 테마인 '골든 타임'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죠. 하지만 개별 루트에서는 자신의 '골든 타임'은 자신의 실패를 극복함으로써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과 함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그녀들과의 연결을 통해 깨닫게 되어 '평범한' 위치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그녀들 또한 주인공과의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몰랐던,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고민을 주인공을 통해 깨닫고 해결하게 되죠. '킨코이'의 각 히로인들은 주인공과의 관계맺음과 주인공에 의한 조력에 의해 내면의 속성들을 숨김 없이 드러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캐릭터성을 가지게 되어 작중에서 생생하게 살아있게 됩니다. '킨코이'에서의 '평범함'과 '특별함'이라는 대립되는 요소는 합쳐지지 않는 형태로 조화를 이루게 되며, 플레이어들은 알기 쉬우면서도 일관성 있고, 인간적 가치를 긍정하는 테마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대립 요소가 있는 이야기에 자신과 히로인을 대입하여 캐릭터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게 되고, 에필로그에 이르러서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 루트가 내포하는 테마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킨코이'의 '테마로 완성되는 캐릭터 - 캐릭터로 완성되는 테마'의 황금비는 공통 루트와 개별 루트를 거치면서 테마에 의한 캐릭터의 매몰, 캐릭터에 의한 테마의 유명무실화 없이 아름다운 구조로 완성됩니다. 

 

그 구조를 확고하게 만드는데는 또한 야겜에서만 가능한 '선택지'라는 도구가 적절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좁은', '넓은' 의미에서의 선택지가 있는데, 좁은 의미에서 보면 개별 루트 내에서는 이지, 삼지선다형의 선택지가 있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개별 루트를 선택하는 것 자체가 선택지가 됩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선택지는 '킨코이'에서 아쉬웠던 점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는데, 선택지가 별 의미도 없고 게임의 몰입에 오히려 방해가 되곤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저 일부 플레이어들의 망상을 충족시켜주는 이벤트를 띄우기 위한 선택지에 지나지 않죠. 반면 넓은 의미에서의 선택지는 '킨코이'에서 '테마에 대한 접근법'을 선택하는 요소로 기능함으로써 테마와 캐릭터의 다채로운 순환을 가능케 합니다. 

 

- 한 작품에서 상반되는 성격이 공존?

 

대립 요소는 본작의 장르에까지 확장되어서 보이고 있는데, '킨코이'는 가볍고 유쾌한, 일반적인 캐러게의 성격을 띠면서도 트루 루트에서는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를 띠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트루 루트는 플레이어가 개별 루트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낳는 이야기일때 성립하지만 '킨코이'의 트루 루트는 그 성질이 조금 이질적인데, 트루 루트에서는 개별 루트에서 테마에 대한 은유들을 관계성 속에서 만끽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개별 루트의 총체라는 풀에서 새롭게 태어나길 바랐던 가치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테마를 상기하면서 플레이어들에게 그 테마를 강요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한편, '리아'는 '골든 타임'이라는 테마를 제시한 히로인답게, 그녀의 루트는 '골든 타임'이라는 타이틀로 정의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뒷사정들이 개별 루트에서 암시되곤 하죠.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그녀가 '트루 히로인'의 역할을 짊어질 자격을 보증하기에 충분할까요? 

 

 

그래도 본작에서는 어느정도의 절충안이 제시되고 있어요. 그건, 그녀의 루트에서 말하는 테마가 개별 루트에서 말하는 테마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녀가 서 있는 트루 루트라는 위치는 문제가 되지만, 그러면 나머지 히로인들은 트루 히로인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걸까? 하는 의문은 쉽게 제기하기 어렵죠. 사실 그녀도 나머지 히로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기는 한 거에요. 그러한 감각으로 트루 루트를 바라봐주기를 원하는 당부가 작중 대화에서 한 번 언급됩니다. 여러모로 작가의 메세지가 담겨 있는 루트이니만큼 리아에게는 작가 자신의 에고가 투영되어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리아 「이렇게, 사람이 죽었습니다, 자, 감동~ 이런게 싫어」
리아 「사람이 죽는걸 도구라고 해야 하나, 이벤트처럼 쓰이는게 싫어」
리아 「죽은 사람한테는 그게 다일텐데」

오로 「……」

나는 이 영화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인생을 살아 온 리아에게는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리아 「딱히 나는 사람을 울리기 위해 살다가, 죽은게 아니라고」
리아 「나는 『살아갈』 뿐이야. 그냥 그게 끝날 뿐이지, 죽음에서 뭔가를 느끼길 원하지는 않아」

 

트루 루트 또한, 개별 루트와 동일한 감각으로 플레이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죠. 이는 당연한 말입니다. 물론 그녀에게서 '죽음' 이라는 속성을 배제할수는 없어요. 하지만 야겜이라는 매체가 텍스트가 주가 되는 게임이니만큼,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감동을 느껴야 하는 부분은, 그 죽음이라는 속성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본능적이고 저렴한 감동이 아니라, 개별 루트에서 느꼈던 감동의 포인트와 마찬가지로,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는 테마에 대한 은유에 공감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아쉽게도 저는 쉽게 공감할 수는 없었고, 그렇기에 '킨코이'는 리아 루트를 제외한 '좋은 캐러게'로만 바라볼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좋은 캐러게조차 되지 못하는 겜들이 발에 채일 만큼 많으니, '킨코이'는 플레이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던 게임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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