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노벨 ~그녀의 여름, 15분의 기억~ / 삶과 이야기
제작사/타이틀 : 日本一ソフトウェア / セカンドノベル ~彼女の夏、15分の記憶~
발매일 : 10.07.29 (PSP)
장르 : ADV
원화: 모리치카
시나리오: 후카자와 유타카
* 네타 없음
RPG 게임 속에서의 HP 게이지처럼, 다소 추상적이지만, 어떤 작품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줄어드는 생명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작가가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인물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캐릭터만으로 구현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기 위해 가상의 설정을 도입한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매체를 통하여 이전까지는 없었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작품을 만든다. 전혀 다른 두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지만, 한 작품은 큰 인기를 끌지 못 하고, 다른 한 작품은 우연히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여기에 또, 한 명의 독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독자는 두 작품의 대중적 인기와는 별도로 두 작품 모두를 인상깊게 즐기지 못 했다. 그러면 작품은 대중적인 차원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순환될까? 대중에게도, 한 독자에게도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 한 전자의 작품은 대중과 한 독자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잠겨버린 후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다시 나올 일이 없을 것이다. 후자의 작품은 대중들에게는 오랫동안 기억되지만 한 독자에게는 전자와 마찬가지로 의식계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이 경우에 전자의 작품은 대중적으로, 개인적으로 생명력이 짧다고 할 수 있고, 후자의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생명력이 짧지만 대중적으로는 생명력이 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작품의 생명력의 장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작품의 인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작품 내에서 접할 수 있는 캐릭터의 매력, 교훈적 요소, 독특한 전개, 참신한 설정? 이 모든 것들에서 얻은 만족이 인기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품의 매력을 통해 얻어진 개인의 만족이 인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만족만으로 작품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는 아무리 빼어난 작품의 매력이 있더라도 영속적인 생명력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대중적이든 개인적(이 경우에는 좁은 의미로)이든, 작품이 생명력을 얻어가기 위해서는 소비 뿐만이 아니라, 만족을 인식으로, 그리고 인기로 변환하는 생산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어떤 작품을 소비하고 나서 그 작품을 사랑하게 된 독자가 있다고 해 보자. 이 독자는 작품을 몇번 더 읽어보고, 그 작품의 사랑스러운 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랑스럽지 않은 점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대체로 독자가 작품을 소비하는 과정이고, 자기 소통이 이루어지며 개인 차원에서 작품의 생명력을 충전시킨다는 점에서 좁은 의미의 생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미로써의 좁은 의미의 생산은 집단 차원에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 한다. 내가 이 작품을 너무 좋아하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이 작품이 누가 만든 어떤 작품이고, 왜 좋은지를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면? 결국엔 그 작품의 가치는 물론 작품의 이름마저 아무도 모르게 될 것이다. 이를 생명력의 개념으로 보자면, 작품이 전파되지 않고 개인 차원에서 계속 머무른다면, 개인의 수명은 유한하므로, 그 작품의 생명력은 대중 차원에서의 생명력을 더 이상 얻지 못 하고 점점 줄어갈 것이며 죽은 작품이 될 것이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맥베스의 기록을 접하고 나서 맥베스라는 작품을 생산하지 않았다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탄생하지 않는 것은 물론 맥베스라는 이름마저 잊혀져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현대의 연출가들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고서 뮤지컬로 각색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현대인의 감성에 맞춰 재해석한 뮤지컬로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를 걸쳐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고 살아있는 이야기, 꼭 그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야기가 생명력을 얻는 방법은, 우선 작품이 개인에게 영향을 주고, 개인이 그 작품을 소비하고, 개인이 그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재생산하고, 다른 개인이 생산된 가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집단화된 규모로 반복됨으로써 실현된다. 인기가 있는 이야기는 이 루틴이 활발하게 돌아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루틴이 돌기 위해서는, 개인의 재생산과 집단이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개인과 집단을 이을 수 있는 징검다리가 필요한데, 그 다리를 놓는 방법은 간단한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도 방법이고, 감상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방법도 있으며, 작품의 요소를 차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공개하는 것 또한 교류의 범주에 포함된다. 중요한 점은, 집단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넓은 의미의 생산이라는 것은 개인이 타인과 소통하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재생산과 소통의 과정 중에서 가장 파급력이 있는 행위는 역시 2차 창작일 것이다. 원작자가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 냈더라도 아쉬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며, 경험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각 독자들은 각자가 작품에서 느낀 다른 형태의 아쉬움들을 캐치하고 자신의 기대와 욕구, 욕망 등을 투영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 작품의 플랫폼이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길디 긴 소설을 직관적이고 플레이어블한, 온라인 게임의 형태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실천되어 반지의 제왕 온라인이 탄생했다. 누군가는, 이 캐릭터가 나와 실제로 접점이 있다면 어떨까, 아니면 원작의 전개가 다른 방향으로(다른 선택지로) 흘러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고민을 해 볼 것이다. 그 생각이 실천되어 수많은 인물, 소설 팬픽들이 지금도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2차 창작이 파급력이 강한 이유는, 영화, 비디오 게임, 컴퓨터, 이제는 VR의 영역까지, 매체의 다양화가 이루어졌고 그만큼 표현과 수용의 방식이 무궁무진해진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어떤 재생산의 방법보다 '역동적' 이고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2차 창작에는 다소 이기적인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든다는 강렬한 욕구는 개인의 능동적인 역동성을 끌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또한, 재생산자는 자신만의 경험과 감상, 그리고 욕망을 바탕으로 원작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 한 부분을 신랄하게 집어낼 수 있으며, 그 결손을 자신들이 가진 창의성을 발휘하여 채우는 형태로 2차 창작을 진행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충족시킴은 물론 다른 독자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타인이 원작을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촉발함으로써 원작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이에 대해서는 서브 컬쳐계에서 가장 2차 창작이 활발한 작품 중 하나인, 즉, 생명력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동방 프로젝트를 예로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다. 작품 그 자체로도 인기가 있지만, 동방 프로젝트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2차 창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2차 창작의 공유의 장인 예대제의 규모가 나날이 커져가는 것으로 시리즈의 인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차 창작자들은 작품에서 어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는 것일까? 아마, 위에서 이야기했던 만족감을 주는 요소들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들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그것은 '이야기'가 된다. 각 독자들은 작품의 '이야기'에 매료되고, '만약 이렇다면' 하는 가능성을 가정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본작 세컨드 노벨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각 인물들이 어떤 이야기-퍼스트 노벨-와 만나고, 이야기를 순환시키고, 새로운 이야기-세컨드 노벨-를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플레이어가 직접 체험하는, 스토리텔링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읽고 소비했던 기존의 독자들이 있었다면, 세컨드 노벨의 시스템은 그런 독자들에게 이제 스스로 작품에 참여해보기를 권유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인공은 사고로 15분밖에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 히로인과 재회하게 되고, 그녀가 썼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아나가기로 한다. 본작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대신이 되어 그녀에게 키워드를 제시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맞춰 나가는 '대리자'의 역할을 맡게 되므로 이야기의 '필연과 개연'에 신경을 쓰면서 이야기를 조합해나가야 한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다음 장면에서는 반드시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필연', 어떤 복선이 있었으니 이후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개연' 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쓴다면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본작에서는 필연과 개연을 무시하는 커맨드를 입력하면 당연히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면 게임이 진행되는 방식, 그녀의 이야기를 주인공, 플레이어가 들어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우선,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죽어있던 그녀의 이야기에 생명력에 불씨를 지피고, 본작이 안고 있는 비밀을 스토리텔링을 통해 알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부모가 자식에게 '네 재능을 믿지 말고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해!' 라는 말을 하기 위해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 직접 화법에 비해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야기해주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고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스토리텔링은 일종의 긴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가 없는 단순한 문장에 비해 스토리텔링을 통한 교훈의 전달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므로 전달력이 풍부하고, 그 표현법이 직접 화법(설득적)에 비해 온화하기에(청유적) 청자가 개념을 받아들이기 전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다. 본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사고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비밀을 알려주기를 요구한다면 큰 거부감을 표시할 것이 분명하며, 그렇기에 스토리텔링 기법은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본작에는 물론 주인공과 히로인 뿐만 아니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야기는 그들을 향해 뿌리를 뻗쳐 나간다. 그녀의 '퍼스트 노벨' 은 타인과 소통하며 두 명의 이야기가 되고, 집단의 이야기가 되고, 점차 생명력을 얻어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숨겨져있던 그녀의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이 세컨드 노벨의 이야기적 구조이다. 그렇다면, '세컨드 노벨'은 이야기의 순환을 통해 어떤 진실을 찾기 위한 목적밖에 없는 뻔한 작품일까? 진실이 중요한 것일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녀의 이야기의 의미를 '읽기 위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고, 이런 부류의 독자들은 본작에 큰 실망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본작이 역설하는, 독자들은 '작품에 에너지를 주는 존재' 일 뿐만 아니라 '작품에서 에너지를 받는 존재' 임을, 즉 '이야기와 나는 상호교류적' 이라는 코드를 느낄 수 있다면, 그녀의 이야기의 의미를 '쓰기 위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류의 독자들은 본작에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의미의 부여는 2차 창작을 통해 이루어진다. 석연치 않은 이야기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새로운 의미를 담은 2차 창작물이 탄생한다. 동시에 우리는 선택되지 않았던 선택지의 세계를 향한 소유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창작물을 통해 각 '캐릭터'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썼고, 무엇을 바랐을까?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이야기를 읽는다. 그들은 어떤 경험을 해 왔을까?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창작자의 의도를 해석한다. 그들은 어떤 '캐릭터' 인 것일까? 우리는 그들의 캐릭터를 읽기 위해 그들의 삶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이야기를 통해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의 삶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직접 소개하지 않아도, 스토리텔링을 통해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이야기를 통해 소통되는 삶, 이것이 이야기의 순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본작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즉, 이야기는 삶이고, 휴머니즘이라는 인상적인 테마를 남기고 본작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이야기의 생명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야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누가 해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이제, 우리 플레이어의 몫이다. 우리는 어느 새 '세컨드 노벨'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이야기의 순환고리에 포함된 '창작자'가 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입맛대로 쓰는 '2번째 이야기'는 '세컨드 노벨'이라는 이야기가 마지막을 고했을 때 진정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쓴 이야기는 누군가에 의해 읽히고,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읽을 것이다. 삶은 유한하지만, 그렇게, 이야기의 생명은 누군가가 기억해주고 소통하는 한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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