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 시리즈에는 적임자가 있다.
탐구2016. 7. 1. 11:09
- 발더 포스/발더 스카이/발더 제로에 대한 네타가 있습니다.
(1) 발더 스카이 제로의 실패요인
에로게 장르에서는 보기 드문 3인칭 메카 액션 게임으로서 명망이 있는 발더 시리즈의 역사는 1998년에 창설된, TGL 산하 기가(戯画) 소속 팀 발더헤드의 이름을 건 1999년 발매 작품인 BALDRHEAD로부터 시작합니다. 21세기 들어서 엔진 및 미술/그래픽 기술의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빨라진 덕분에 지금 시점에서 플레이를 해 보면 최근의 화려한 액션 게임들에 익숙해진 시선으로는 별 감흥이 없는 없는 작품입니다만 그 당시에는 상당히 인기를 끌었고, 그에 힘입어 후속작인 장갑희 발피스-발더바렛을 발매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발피스의 경우에는 발더 시리즈의 흑역사라고 할 만한 작품입니다만, 그 후속작인 발더바렛으로 재기하는데는 성공하고 다음 발더 시리즈의 작품을 발매하기까지 약 2년간의 휴식기를 가지게 됩니다. 1)
2002년 11월, 그 전에 발매됐던 발더 시리즈의 발매 텀보다 살짝 긴 휴식기를 가지고 돌아온 발더 시리즈의 최신작-발더 포스-은 전작들과 비교해볼 때 여러가지 면에서 상당히 진보했는데, 우선 초기작 BALDRHEAD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퀄리티의 OP무비 (그 당시로는) 가 특징입니다. OP무비에 곁들이는 에로게송도 작품 분위기에 잘 맞는, Feel이 충만한 곡을 선정했는데, 그 곡은 공교롭게도 KOTOKO氏의 인생곡중 하나인 'Face of Fact' , 역시 명작에는 명곡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또한 발더바렛부터 도입된 BaldrX 엔진, 현재 발더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전투파트 및 다양한 부분에서 상당한 연출력의 진보를 보여주며 발더 특유의 독특한 게임성을 완전히 정립시켰다는데도 의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작들과 비교해볼 때 발더 포스에서 가장 혁신적이었던 부분은 기존의 발더 세계관을 바탕으로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시작됐다는 점입니다.
HAWS / GIGAS라는 현실의 로봇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발더 포스부터는 슈미크람이라는 가상계의 로봇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로 변모하게 되는데, 장르적으로 보자면 건담 시리즈와 같은 전형적인 로봇 액션물에서 공각기동대로 대표되는 가상현실 기반의 장르로 변했달까요,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같은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전례들이 있었고 발더의 이러현 변화 또한 그러한 작품들에 크게 영향을 받은 작품이기에 큰 충격까지는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의 패러다임이 변화된 것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의 질이 상당히 좋아졌고 분량 또한 증가하며 게임성과 시나리오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발더 포스는 발더 시리즈의 혁신이었다)
발더 포스의 대성공 이후 7년이라는 긴 공백기를 가지고 돌아온 발더 스카이는 7년이라는 준비기간답게 발더 포스의 텍스트량의 약 2.5배라는 방대한 분량과 그를 뒷받침하는 기존 전투 파트에서 다방면으로 업그레이드된 시스템에서 비롯된 뛰어난 게임성, 기가의 명물이자 최고의 스크립트 엔진 중 하나인 NeXas 엔진의 도입, Restoration과 Jihad 라는 명곡을 들고 온 I'VE의 KOTOKO氏 및 여러 음악 팀들의 합작, 키쿠치 세이지氏의 미려한 원화 등 종합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에로게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작품으로서 발더 시리즈의 성공가도를 이어나갑니다.
물론 전작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설정은 발더 포스의 후대라는 설정에 맞게끔 발더 스카이에도 개변되어 적용되었으며, 비록 그 모티브나 주요 소재가 공각기동대를 비롯한 다양한 관련 작품들이 이미 사용했던 것들이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언급이 나오긴 합니다만, 독자적인 설정은 발더 스카이에서 완성되기에 이르릅니다.
분할 발매를 했다는 점이 비판받기도 했습니다만, 한 편의 분량이 왠만한 풀프라이스 에로게 한 편에 맞먹는 텍스트 분량 (약 2MB)을 담고 있기에 분할 발매를 해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습니다. 반복 문장이 다소 많기는 하지만 루트에 따라 동일한 문장이라도 그 뉘앙스가 바뀔 때도 있고, 그로 인해서 선택의 결과가 바뀌는 경우도 있으니 그 점을 탓할 수도 없겠지요. DIVE2 발매 후 결과적으로는 분할 발매에 대한 반응도 작품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됐다기 보다는 전작이 재밌어서 후속작을 하루라도 빨리 하고 싶은데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투정 비슷한 것이었으니, 사람들이 발더 시리즈에 걸고 있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도 있을 법 합니다.
발더 스카이는 그 높은 완성도 덕분에 다방면으로 충분히 박수를 받았고, 발더 시리즈 1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기도 하기에 그 종지부를 찍었으면 발더 포스와 함께 에로게 역사에 영광스러운 이름을 남기고 은퇴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성공이 성공을 불렀기에 더 큰 성공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겁니다. 그런 마인드야 말로 야심찬 기업인이 가지는 바람직한 마인드죠. TGL 및 발더헤드 스탭들의 야망은 하늘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유저들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발더 시리즈가 아닌 시리즈의 역사를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기대감을 안고 다음 시리즈를 기다리게 됩니다.
(발더 시리즈의 10주년 작품, 기존 세계관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게임이 된 발더 스카이)
그런데 발더 스카이의 발매일로부터 3년 후, 팀 발더헤드는 발더 시리즈가 아닌 마테리얼 브레이브라는 작품을 내놓습니다. 플레이해보지는 않았지만, 한/일 양국의 블로그나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는 리뷰들을 보니 그 작품이 10년간 쌓아 놓은 팀 발더헤드의 이름값에 걸맞는 작품으로는 영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유저들이 기대하던 발더 시리즈는 아니었지만 팀 발더헤드의 마테리얼 브레이브 또한 후속작이 나오며 완결이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더 시리즈 차기작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정식 명칭은 BALDR SKY Zero / 발더 스카이 제로 (이하 발더제로) . 발더 스카이의 스핀오프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팀 발더헤드가 마테리얼 브레이브 제작에 참여했고 그 완결편의 발매와 발더제로의 발매일 텀이 8개월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발더제로는 발더헤드의 이름을 걸지 않았습니다. 메카 디자인이나 전투 시스템에는 디자이너 MUSASHI氏를 비롯한 발더헤드 스탭이 관여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전체적으로 JINKI EXTEND 팀에서 제작을 진행했던 것이죠.
유저들은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런게, 우선 JINKI EXTEND는 그 원작이 코믹스였고 애니화도 됐던 나름 인기있는 작품이었지만, 코믹스 원작자인 츠나시마 시로氏가 기가에서 원화가로 참가해서 게임화된 JINKI는 기가마인의 악명을 드높이는 심각한 쿠소게였으니까요. 작품이 발더 시리즈 타이틀을 건 작품이라는 것은 고사하고서라도 대차게 말아먹은 작품의 제작진이 후속작을 내놓는다는데 아니 불안한 유저들이 있겠습니까?
가장 큰 문제는 그 제작진이 다른 발더 시리즈도 아닌 '발더 스카이' 라는 타이틀명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발더제로는 발더 스카이의 후속작이 아닌 스핀오프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최고의 작품을 함께 한 유저들의 추억에 좋지 않은 스크래치를 남길 위험성이 다분했습니다. 게다가 원화가와 시나리오라이터는 변경되었고, 그나마도 발더제로의 시나리오라이터는 메카물 집필 경험이 일천한 시나氏였으니.. 오히려 원화가 (발더제로 또한 진키의 원작자인 츠나시마 시로氏가 원화 담당입니다) 가 메카물 제작 경험이 더 풍부하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죠.
발더제로의 제작진들의 발더 스카이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높을 지, 발더 스카이의 설정을 얼마나 잘 고증할 수 있을 지, 과연 발더 시리즈의 이름값에 걸맞는 재밌는 작품이 나올 지 의심하는 시선은 발더제로 발매일까지도 계속해서 끊이질 않았으며, 그 의심은 대체로 들어맞았는지 기대 반 불안 반을 갖고 발더제로를 시작하고 클리어한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불평을 반복했습니다. 저 또한 속된 말로 이건 발더 시리즈 이름에 똥칠하는 작품이라는 감상을 머릿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물론 기존 발더 시리즈를 접하지 않았던 유저라면 발더제로를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발더제로2에서 개선된 전투 시스템이나 시나리오의 끝맺음은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것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발더제로는 발더 스카이의 스핀오프이니만큼 전작을 플레이하지 않은 유저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생기기 마련이고 결국 실질적인 플레이층은 발더 스카이를 접했던 기존 유저들로 국한되기에 발더 스카이에 대한 감상을 그대로 가져와서 그만큼 높은 기대치를 걸기 마련이니,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발더제로의 실패 요인은 무엇일까?
발더제로의 감상문이 아닌 만큼 넓고 깊게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위에서 언급한 '제작진의 발더 스카이에 대한 이해도, 발더 스카이의 설정에 대한 세심한 고증, 발더 시리즈의 이름값에 걸맞는 재미' 라는 과정이 충족되어 있는지를 개인적인 감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공작품의 제작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제작품의 설계 의도 이해 - 설계 과정 숙지 및 메뉴얼에 따른 정확한 제작- 실제 제작품의 만족스런 결과 도출 여부 확인이라는 3단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발더 스카이의 스핀오프라는 점에서 그 제작 의도는 괜찮았습니다. 인물과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발더 스카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려 했던 시도 자체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도 스핀오프임에도 불구하고 본편과의 접점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에 대한 스탠스에 문제가 있다는 평이 있습니다. 발더제로의 시간배경은 회색의 크리스마스 이후 카도쿠라 코우&키리시마 레인이 세계 각지를 떠돌던 시절, 그들이 SAS에 들어오면서 발더제로의 주인공 일행과 공투하게 된다는 것인데, 전작 주인공&전작 인기투표 1위 히로인을 등장시켜 놓으니 기존 유저들 입장에서는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합니다. 자칫하면 더블 주인공 체제가 가져오는 단점을 고스란히 안을 수도 있었지요. 다행히 비중 조절은 잘 해놔서 어느 한 쪽이 묻힌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다만, 설계 과정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제로에서는 변경된 카메라워크와 3D 디자인을 채택하는데, 최적화 실패로 인해 잦은 튕김 현상 및 렉이 발생합니다. 물론 튕김 문제는 게임 특성 상 포스&스카이 시절에도 있던 문제이긴 합니다만, 제로에서는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증가했습니다. 전투 파트에서는 장착 가능 무장 수가 줄어든데다가, 포스 크래쉬마저 자동 발동이 되기에 정상적인 콤보를 넣는게 힘들어졌습니다. 이는 손맛을 중시하던 팬들에게 제대로 실망을 안겨준 점이죠. 전투의 양상도 원거리전이 용이했던 전작들과 달리 원거리 무장이 너프를 먹어서 근접전 양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투 파트야 발더제로2 시점에서 개선된 부분이 있으니 시험적인 시도였다고 볼 수가 있어도, 이야기적으로는 발더 스카이의 팬들이라면 전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발더제로1의 이야기들은 그 각각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기존 발더 시리즈는 하나의 비밀을 각 루트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공개함으로써 진상을 알아가는 추리적 요소 또한 있었고, 각 루트에서 비슷한 대사나 문장, 전개가 등장하더라도 그 뉘앙스가 다른 경우가 많고 각 루트로 분기되는 과정을 그리는 시나리오적 연출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발더제로1 시점 올 클리어 시점에서는 이 이야기가 당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각 루트의 이야기가 따로 놀고 있습니다. 발더제로2에서는 이 연결이 어느 정도 이어지는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전개마저도 유저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하지 않은 방식을 택합니다. 게다가 공통 루트는 통째로 스킵이 가능해서 감각적인 시나리오 연출은 완전히 실종됐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은 물론 소재적으로도 실패했는데, 아무리 스핀오프라고는 하지만 발더 스카이와 그 시간 배경이 비슷한 만큼 발더 스카이와 동질감을 느낄만 한 소재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만, 발더제로에서 등장하는 소재들은 기존 발더 스카이 세계관을 통째로 뒤흔드는 것들이었고, 그러한 소재들이 양적으로 난무하는 나머지 이야기를 위한 소재가 아닌 소재를 위한 이야기가 된다는 부정적인 전도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소재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거부하며, 겉멋을 위한 쿠세만이 가득한 작품이 되어 버리는데, 발더제로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발더제로2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소재의 설명을 위해서 이야기의 재미는 완전히 포기하는, 역대급이라고 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템포를 보여줍니다. 당연히 얼마 남지 않은 시나리오 분량을 짜 내서 황급히 설명하는 것이기에 유저들은 대체로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없고, 그 설명을 억지로라도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하다 보면 '즐기기 위한 게임'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끔찍한 물건이 돼버립니다. 이렇게 과정이 좋지가 않은데 결과가 좋을 리는 없지요.
(발더 스카이의 명성에 제대로 먹칠을 한 발더제로)
아마 발더제로의 시나리오라이터는 발더 스카이가 쌓아 놓은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거나, 발더 스카이의 세계관을 압도하는 이야기를 써 내고 싶었기에 다양하고 어려운 소재들을 등장시키고 난해한 구성을 취했던 것 같지만, 실상 파헤쳐보면 그 깊이는 기존의 발더 시리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얕습니다.
이는 발더제로에는 소재에 대한 철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발더 포스와 발더 스카이는 시나리오라이터의 소재에 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유저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제공하고자 했다면, 발더제로는 그러한 탐구는 없이 오로지 부담감에 시달렸거나 혹은 발더 스카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나리오라이터의 욕심만이 가득해서 유저들은 안중에도 없는 게임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발더 포스 및 발더 스카이의 시나리오라이터인 히에이 무라사키氏 및 키카구야 2) 가 발더 포스와 발더 스카이에서 추구했던 것, 유저들을 매료시켰던 것은 무엇일까요?
(2) 히에이 무라사키/키카구야의 역량
발더 시리즈는 액션 게임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전투 요소의 재미라는 게임성이 가장 중시되기는 합니다만, 액션 게임들도 게임성과 잘 조화가 되는 탄탄한 스토리가 갖추어져 있어야 플레이어의 깊은 몰입도를 이끌어내며 명작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하프라이프나 헤일로 시리즈와 같은 성공한 작품들의 케이스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겠지요.
발더 시리즈 또한 초기적 액션 게임에서 탈피해서 에로게라는 장르에서 쟁쟁한 비주얼 노블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게임성 뿐만 아니라 이야기적으로도 보완할 필요가 있었는데, 세계관의 획기적인 변경을 비롯해서 시나리오의 질과 양을 동시에 만족시키며, 또한 그것들을 게임성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역량을 한 작품만을 통해서 단번에 보여준 시나리오라이터가 있었으니, 팀 발더헤드의 든든한 우군, 발더 포스의 시나리오라이터인 히에이 무라사키氏 및 소속 상조회인 키카구야였습니다.
발더 포스의 세계관이 가상계로 변화함에 따라 그에 따르는 철학적 가치 또한 달라지는데, 예를 들면 현실의 전쟁을 그리는 작품들에는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 아래에 한없이 작아지는 한 인간의 무력함,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무감각해져가는 인간성의 상실이나 회복 등을 그릴 것이지만 전뇌를 바탕으로 하는 가상계에서는 새로이 정의되는 사이버 윤리와 그에 반하는 범죄의 양상, 가상 개체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 등이 주가 될 것입니다. 히에이氏는 그러한 가상계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립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시나리오적으로 구현해내는 능력 또한 괄목할 만 합니다.
우선, 발더 포스와 발더 스카이에서는 표층 의식/심층 의식의 대립과 다차원 세계에 대한 네타를 주로 사용하고 있고, 발더 포스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표층 의식과 심층 의식에 대한 네타입니다. 그 네타를 등장 인물과 사건이라는 형태로 이해하기 쉽고 자연스럽게 구현해낸다는 점이 발더 포스의 핵심 컨셉이자 유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었죠. 동료애라든지 각성과 위기의 극복이라는 열혈 전개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소 상실한 스토리적 개연성이나 연애 파트의 부족함이 조금 아쉽긴 합니다만, 그마저도 편의주의적 전개를 열혈물이라는 장르에서 큰 거부감 없이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 잘 이용하는 시나리오라이터라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여튼, 게임성과 시나리오의 적절한 조화로 빚어진 발더 포스는 2002년 당시에 발매된 작품으로서는 최고로 인정받을 만 했습니다. 물론 발더 포스는 명작 불변의 법칙을 확실히 지키는 작품이니, 발매일로부터 약 14년이 지난 지금 플레이해도 꽤 재밌습니다.
(발더 포스의 주제를 꿰뚫고 있는 두 인물인 히카루, 겐하 / 인물이라는 형태로 네타를 구현한 좋은 예시)
한편, 히에이氏는 유저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섬세한 문장을 쓰는 능력 또한 갖추었으며 문장과 단락의 템포의 고저를 수준급으로 조절할 수 있기에 유저들에게 잠시라도 게임에 질릴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4.5MB에 육박하는 텍스트 분량 (발더 포스 - 2MB) 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저들을 타임리프의 피해자(?)로 만든 발더 스카이에서 진가를 발하며, 발더 포스에서 어렴풋이 보여 줬던 다차원세계에 대한 네타를 발더 스카이에서는 완성된 형태로, 이해하기 쉽게 주요 네타로 하면서 시나리오로 구현해내며 다시 한번 유저들을 매료시킵니다. P.S)
또한 발더 스카이는 학원 시대의 시점/현재의 시점을 교차서술하는 방식을 통해서 주인공과 여타 캐릭터들의 개성을 충분히 살리며 최근 에로게가 지향하는 상업성을 갖추는 데 (캐러게적 요소) 성공했고, 발더 포스의 수동적이고 무미건조했던 연애 파트도 개선했습니다.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개연성도 발더 포스보다 납득이 가는 형태로 갖췄지요. 두 배 이상 늘어난 텍스트 분량은 헛되이 쓰이는 일 없이 오롯이 이야기적 완성도를 높이는 형태로 쓰였기에, 발더 스카이는 액션 게임이 갖춰야 할 탄탄한 스토리라는 덕목을 완전히 갖춘, 발더 시리즈의 완성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게임이 되었습니다.
(발더 스카이는 캐러게적 요소 또한 성공적으로 캐치했다)
(3) 다시 돌아오는 발더 신작에 대한 기대
요약하자면, 발더 포스와 발더 스카이라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써 낸 것은 결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작품에는 좋은 작가가 있기 마련이고, 좋은 작가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기 마련이며, 그 철학을 조리있게 글로 써 내는 능력이 있다면 그 때서야 명작이 탄생하게 됩니다. 히에이氏는 그런 능력을 충분히 갖고 있는 시나리오라이터였죠. 발더 시리즈에는 적임자가 있으며, 그 적임자는 발더 세계관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갖고 있고 필력 또한 뛰어난 히에이 무라사키氏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보면 발더제로가 실패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발더 시리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시나리오라이터를 내세웠으며, 그 시나리오라이터 또한 특정한 소재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겠지만 발더 스카이라는 작품에는 어울리지 않는 철학이었을겁니다. 문장 솜씨나 시나리오적 연출력이 부족한 것은 덤입니다. 차라리 발더 스카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쓰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뱁새에게 황새를 따르라고 무리하게 시켰다가 가랑이만 찢어진 셈입니다.
이제 발더제로의 흑역사를 지우기 위해 2016년 혹은 2017년에 새로운 발더 시리즈가 발매될 것 같은데요, 다행히 이번에는 팀 발더헤드의 이름을 걸었으며 히에이 무라사키 With 키카구야가 다 죽어가는 발더를 살리기 위해 재출격합니다. 바뀐 점이 있다면 발더 시리즈의 발매 텀이 길다 보니 팀 발더헤드에서도 이탈한 스탭들이 있다는 점, 원화가가 키쿠치 세이지氏가 아닌 히노오카 슈지氏로 변경되었다는 점. 이 분도 원화 스타일이 한 로리 하시는 분인지라 마테브레와 DIVE X 이전의 키쿠치 세이지氏의 원화를 기대하던 분들에겐 조금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군요.
발더 시리즈의 최신작은 발더제로로 실망한 많은 발더 팬들의 아쉬움을 달랠 또 하나의 명작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발더의 흑역사에 한 줄을 더 그을지 그 귀추가 주목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맞는 옷을 입고 찾아오는 만큼 좋은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감히 예단해봅니다.
(7년만에 다시 돌아오는 발더 시리즈의 최신작은 충분히 기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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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더 시리즈의 발매일은 각각 발더헤드 1999년 7월 , 발피스 1999년 12월, 발더바렛 2000년 10월, 발더포스 2002년 11월, 발더 스카이 DIVE1 2009년 3월, DIVE2 2009년 11월, 발더 스카이 Zero1 2013년 9월, Zero2 2014년 3월
2) 企画屋, 시나리오라이터 상조회. 주요 구성원으로는 마루토 후미아키(파르페 쇼콜라, WA2), 히에이 무라사키(발더 포스, 발더 스카이), 자시키네코(영원의 아세리아, 휘광익전기) 등이 있다.
P.S) 전뇌와 다차원세계에 대한 네타는 공각기동대-매트릭스 등에서 이미 시도했던 내용이기에 발더 스카이에서는 이러한 네타를 접했을 때 신선함이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주제적으로는 발더 포스가 낫고, 이야기나 시나리오 구성적으로는 발더 스카이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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