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의 대흥행, 에로게는 무언가을 배울 수 있을까?
* 신카이 감독의 전작들 및 너의 이름은.에 대한 내용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지난 8월 일본에서 처음 개봉된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이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매출 2위에 랭크되는 예상 외의 큰 성적을 거두며 제작진과 평론가, 관객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어느 평론처럼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그의 작품은 지금은 예전만 못 하지만 흥행 보증수표였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지브리를 잇는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포스트 지브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의견에 부정적입니다. 만약 콘 사토시 감독이 살아서 계속 작품을 제작했다면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수식어가 붙는 명감독이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너의 이름은.'이 침체된 재패니메이션 시장에 부활탄을 쏜 것은 쏜 것이고, 신카이 감독은 신카이 감독일 뿐입니다. 두 감독 사이에 세워져 있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으며, 그건 잘 구별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것은 연출 기법같은 작은 부분부터,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그 전달 방식같은 큰 부분까지 아우르는, 무성의한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스타일'의 차이입니다. 그 중에서 신카이 감독의 작품에서 곧잘 보이는, 에로게와 관련해서 논의해보고자 하는 아주 사소한 한 가지의 스타일의 차이가 있습니다.
* 남녀의 연결과 감성
(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이름을 알린 초기작 '별의 목소리'(2002) )
미야자키 감독이 인간, 사회, 사상 등 다양한 가치들을 관찰한 결과를 상징을 통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면 신카이 감독의 작품에서는 별달리 거창한 메세지를 읽을 수 없더라도 남 주인공과 여 주인공의 대비라는 한 가지 구도는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그 대비는 다양한 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변화구 없이 부딪히는 사랑이 주된 소재가 된다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뤄질 수 어려운 사랑이, 때로는 역경이 찾아오는 상황에서의 사랑이, 때로는 지우지 못 하는 사랑의 미련이. '커플' 이나 '사랑' 같은 소재는 신카이 감독의 작품들에서 메세지를 전달하는 도구로써, 감성을 자극하는 소재로써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이러한 신카이 감독의 작품들의 한 가지 특징은 야겜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합니다. 야겜에도 남 주인공과 여 주인공이 있고, 서로 사랑을 하고, 어떤 사건과 맞닥뜨리는, 혹은 해결해나가는 요소가 있고, 그 과정 중에서 서로의 감정과 맞닥뜨립니다. 가장 생각하기 쉬운 형태의 야겜은 'CATION 시리즈'와 같은, 현실감이 있는 정통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단순한 선택지만으로 히로인을 그저 공략하는 야겜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니 사랑이라는 소재 외엔 자랑할 거리가 없는, 혹은 퇴폐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게임들이 정녕 아름다운 이야기나 고상한 메세지를 담을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최근에는 야겜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작가가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자신만의 메세지를 담아낼 수 있는 멀티루트 게임이나 소설 형식의 게임들 또한 많이 발매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천차만별이지만 접근법부터 구조까지 상당한 공통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도 나도 같은 스타일에 편승하다 보면 지나친 획일화로 자멸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잘 팔리는 작품이 꼭 명작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침체기에 있는 야겜 시장의 크리에이터들은 초대박을 친 너의 이름은.의 흥행요소를 보면서 반성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원천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절대적인 명작' 으로 인정받지는 못 하더라도 많은 플레이어들을 매혹한 '좋은 작품' 으로서 기억될 수도 있겠지요.
한편, 며칠 전 국내에도 정식 개봉이 된 너의 이름은. 은 이전부터 애니메이션이나 서브컬쳐 작품들을 즐기면서 해당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관객층 외에도 성비와 연령대에 관계없이 -아마 애니메이션 관람이 주된 취미는 아니었던- 많은 관객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즉 너의 이름은. 의 흥행은 제작진이 우연찮게 대중의 입맛에 잘 맞는 트렌드를 잘 캐치했다거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트렌드를 잡은 구체적인 흥행요소는 무엇일까요? 작품은 마치 정해진 레시피 없이 결과물만 있는 요리와 같아서 그 맛이 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고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유추해볼 수는 있습니다.
* 플러스 요소 - 오감 만족
( 신카이 감독이 약 10년 전 제작에 참가한 'ef the first tale'(2006)의 OP무비 中 )
영화라는 매체의 강점은 책의 활자를 보고 전적으로 공감과 상상력에 의존해야 하는 독자와는 달리 관객들의 오감을 즉흥적으로 만족시켜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너의 이름은. 은 영화의 본분에 맞게 관객들의 오감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전작들에 비해 늘어난 제작비가 빛을 본 듯, 신카이 감독의 빛을 이용한 일상, 상황과 감정까지 묘사하는 여전한 특기와 더불어 이번 작품의 소재 중 하나인 유성의 화려함을 잘 표현하는 등 각종 연출이 관객들을 압도하며, 그 이전까지 음악 담당으로 참여했던 텐몬 대신 화려한 이미지에 걸맞는 락밴드 레드윔프스가 음악을 담당한 선택 또한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 2016년 발매된 작품 중 최상급의 배경 CG와 연출력을 선보인 RASK의 처녀작 'Re : LieF'(2016) )
사실 에로게는 풀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텍스트만으로 구성된 소설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는 장르이므로 어느 한 쪽에 무게를 두는 결정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연출력의 발휘는 그런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에 있고, (자금적인 문제는 있겠습니다.) 연출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지만,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나마 업계에서 연출력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유즈 소프트, minori, 퍼플 소프트웨어 등의 제작사는 연출력에 부단히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많은 야겜들의 연출력은 심심한 연출력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어서 아쉬움을 자아냅니다. 유저들이 기꺼이 선택할만 한 매력적인 작품이 되기 위해서, 야겜의 방향성은 이제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인 그림연극이 아니라 좀 더 역동적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실현법은 이전까지는 기술적 한계에 막혀있었지만, 최근에는 VR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플레이스테이션 등 콘솔 기기를 중심으로 VR 기술이 테스트되고 있지만, PC 환경에서도 무리없이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어 야겜 크리에이터들이 VR 기술에 주목하고 야겜과 접목시킬 수 있다면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플러스 요소 2 - 적절한 템포 / 마이너스 요소 - 시나리오의 구성
( 단편 모음이라는 이질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신카이 감독의 과거작 '초속 5센티미터'(2007) )
특별한 목적 없이 롱테이크를 남발하는 영화는 관객들을 지루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잦은 화면 전환과 스토리 축약은 관객들이 이야기를 놓치게 만듭니다. 연출의 연장선상에 있는 템포 조절은 관객들의 집중력을 흐뜨리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너의 이름은. 은 관객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선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적절히 끊어내고 유쾌함과 진지함을 적절히 배분하는 경쾌한 템포를 보여주며, 이 또한 성공의 요인 중 하나로 보입니다. 하지만 시나리오의 질과 밀도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습니다. 등장하는 소재는 사건에 대한 필연성을 아주 충분히는 제공하지 못 하고 찝찝한 개연성만을 제공하며, 사건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인물의 심리를 그리 친절하게 제공하지는 않고 독자의 몫에 맡길 따름입니다. 난해한 심리는 아니므로 충분히 이해는 가능하겠지만, 당연히 현실과 이야기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영화는 매체 특성상 제한된 시간 안에 기승전결 과정이 마무리되어야 하는 제약이 있으므로 어떤 부분은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밀도 높은 시나리오의 구성은 텍스트 분량이 많은 에로게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영역입니다. 템포와 시나리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시나리오는 단기적으로 한 장면 안에서 매끄럽게 대화가 이어지며 플레이어에게 소소한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장면들이 모이면 하나의 챕터가 되고, 이 챕터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난 뒤 남은 챕터들을 모으면 하나의 루트가 됩니다. 시나리오의 주된 역할 중 하나는 구성력으로, 한 루트가 완성되기 위해서 한 장면이나 한 챕터에 모든 역량을 할애하지 않고, 버릴 부분은 확실히 버리고, 살릴 부분은 확실히 살리는 일입니다. 한편, 시나리오는 시작과 끝이 있을 뿐 그 사이의 내용은 시간과 분량의 제약이 적으므로 세밀한 묘사가 가능한 장점이 있지만 롱테이크 기법과 같이 세부 묘사를 목적 없이 잦은 빈도로 사용하면 템포가 느려집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의 문장을 읽을 때 문장을 형태소 단위로 분할하여 읽지는 않고 문장 그대로 읽듯이, 템포의 역할은 작품의 감상이 독자가 집중해서 의식할 수 있는 범위에 머물러있도록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유지해주는 일입니다. 각 파트를 결합하고, 각 파트들이 하나의 작품으로서 자연스러운 '흐름' 으로 이어지는 정도를 다듬으면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minori의 시도가 돋보이는 '소레요리노 전주시'(2015) )
대부분의 야겜에서 '한 루트' 까지는 집중하기가 어렵지 않고 시나리오와 템포에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작품의 수준이 갈리는걸까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소설이나 영화가 게임과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챕터의 모임이 하나의 작품이 되지만, 게임의 경우에는 챕터의 모임이 하나의 루트가 되고, 루트들의 모임이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즉, 게임은 여러 루트들의 모임으로, 하나의 작품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에 있습니다. 차원이 증가하며 새로이 도입되는 변수는 플레이어들에게 익숙한 '선택지-분기' 라는 존재입니다. 이야기의 다발이 하나의 게임이 되면 '선택지-분기' 또한 고려해야 하므로 시나리오와 템포 조절은 더욱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크리에이터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무의미한 선택지를 늘어놓아 플레이어를 지루하게 하거나, 한 루트와 다른 루트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를 낳을 수 있는 상상력이 고갈되었지만 무리하게 루트를 늘리거나, 루트를 통합하지 못 한 나머지 황당한 결론을 내놓거나 하는 식의 예들이 있습니다. 에로게라는 매체가 지닌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게임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은 자신들이 '멀티루트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자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스크립트 분량 증가에 의한 늘어짐이나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크리에이터가 자초하는 시나리오 실패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긴 시간동안 게임을 플레이하기 싫어하는 플레이어들을 공략하기 위해 최근에는 대체로 한 게임의 스크립트 분량이 2MB를 초과하는 텍스트 인플레이션 거품이 꺼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다른 어떤 장르와 매체도 다루지 못 하지만 야겜만이 다룰 수 있는 소재가 있고 표현이 있기에 이를 잘 활용하는 게임을 만드는 것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 메세지의 인상적인 전달
( 야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스토리텔링 방식에 충실한 게임 중 하나인 '미소녀 만화경' 시리즈 )
좋은 이야기를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어떤 메세지가 가슴에 스밉니다. 그것은 작가가 이야기를 빌어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일수도 있고, 독자의 경험과 해석을 통해 가공된 메세지일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좋은 이야기들이 어떤 교훈이나 계몽을 위한 이야기였다면, 현대의 이야기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이야기의 인상적인 전달을 목표로 삼습니다. 신카이 감독의 작품들은 구체적인 메세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관객들과 감성적인 코드를 공유하고자 한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것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일부이며 특유의 스토리텔링 방식인 것입니다.
사랑이 지니는 감성을 신카이 감독이 메세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이용하듯, 야겜 크리에이터들은 플레이어들에게 섹슈얼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겜이 '좋은 야겜'이 되려면 야겜 내의 모든 성적인 묘사들은 이야기 전체의 흐름과 동떨어지지 않아야 하며 메세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자연스럽게 활용되어야 합니다. 섹슈얼 코드와 메세지가 전혀 맞물리지 않고 서로 각자의 이야기만 하는 게임이 있다면, 그런 게임은 굳이 야겜으로 만들어질 이유가 없었다거나, 이야기가 있는 게임이 될 필요가 없잖아요? 인상적인 메세지를 줄 필요도 있지만, 최근에는 스토리텔링 기법이 유독 강조되는만큼 어떻게 인상적으로 전달해야 할 지를 우선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 복제가 아닌 참고로써
결국 애니메이션과 야겜은 다릅니다. 애니메이션에는 애니메이션만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있고, 야겜에는 야겜만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있기에, 어떤 야겜이 너의 이름은. 의 장점들을 완벽히 카피한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단순한 복제에서는 아무런 배움도 없고 새로운 가치도 생산하지 못 합니다. 신카이 감독의 스타일을 복제한 야겜이 발매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이 정답이라고도 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마케팅 전략만큼 작품의 방향성이나 질 또한 중요하고, 성공을 목격했다면 그 성공 전략을 참고하여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재생산하고 새로운 활로를 열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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