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

천사가 없는 12월

Edan 2022. 1. 6. 01:53

 

제작사/타이틀 : Leaf / 天使のいない12月

 

평점 : 7/10

 

 

* 본작과 '토토노'에 대한 스포일러 O

 

 

본작을 15년쯤 전에 설치는 했었는데, 첫 씬을 보고 받은 신선한 충격에 그만 삭제해버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행운이었던것 같다. 그 때는 야겜을 접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는데, 그 때 플레이했다면 본작은 그저 그런 겜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 같다. 최근에 본작을 다시 플레이하고 엔딩을 보니, 이 겜은 다양한 야겜들을 먼저 접하고 플레이해야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겜이 무슨 전공 서적도 아니고 어떤 겜을 먼저 플레이하지 않으면 특정 게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다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가끔씩, 플레이 시기에 따라 확연히 다른 인상을 주는 겜들이 나오곤 한다. 본작이나 '토토노' , '미래에 키스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데, 이런 작품들은 야겜에 대한 메타인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야겜의 구조를 모르고 플레이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두개의 야겜을 플레이한 이후, 가능하면 야겜의 탬플릿을 대강 이해할 수 있을 때 플레이해보는 것이 작품에 대한 깊은 감상도, 날카로운 비판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본작은 기존 야겜들의 완벽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야겜의 안티테제라고 하면 '토토노' 같은 류의 게임들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그런 작품들과는 내포하는 메세지도 다르고, 한편으로는 그 '토토노' 보다 완곡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메세지를 전달한다. 야겜의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기존 캐러게의 형식을 따라가면서도 그 속에서 은근하게 어필할 수 있어야지, 굳이 메타 게임의 형식을 빌려서 히로인을 싸이코로 만들면서까지 그 메세지를 강제할 필요는 없다. '토토노'를 플레이하면서 왜 플레이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사실 애초에 '토토노'는 캐러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할 뿐이지, 그 지적은 소재일 뿐이고 여느 캐러게 야겜과 다를게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존 야겜의 안티테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본작의 경우 일반적인 야겜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이를 비트는 구조를 보여준다.

 

 

기존 야겜의 특징들은 간단하게 정리된다. 주인공과 다수의 히로인이 등장하고 선택지를 골라 해당 히로인 루트로 진입한다. 각종 이벤트를 겪으면서 주인공과 히로인 사이의 호감도가 상승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 그 사랑의 결과물적인 성격으로써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결말은 서로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것이다. 게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가 히로인을 '공략' 하는 것이며, 캐릭터의 평가 기준에는 캐릭터의 스토리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속성'이 포함된다. 플레이어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스토리, 여동생, 소꿉친구 같은 관계성, 츤데레, 도짓코같은 성격, 성우의 연기력이나 일러스트의 취향같은 외관적 속성 등을 종합적으로 보고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선택하게 된다. 

 

본작의 야겜의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은 작품의 모든 부분에서 드러난다. 우선 겉으로 보이는 '속성'을 최대한 배제했다. 이야기의 시작 시점에서 주인공과 긴밀한 접점이 있는 히로인은 없으며, '모에한' 캐릭터가 아닌, 평범한 머리색과 외모를 가진 캐릭터들만 등장한다. 또한 학교가 무대이지만 평범한 학교 생활을 연상시키는 이벤트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일정 호감도 수치를 달성해야 등장하던 육체적 관계는 호감도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주인공과 히로인이 영원의 사랑을 맹세하는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이어지는 듯 하는 암시는 나오지만, 그것은 사랑은 아니고, 12월의 내리다 마는 첫 눈과 같이 덧없는,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순간적인 감정으로 묘사된다. 마지막 씬에서는 또한 본작의 메세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주인공과 히로인은 '지금은' 서로 이해할 수 없기에 이어질 수 없다는 독백이 흘러나온다.

 

もしかしたら、ふたりは同じ想いを抱いていたのかもしれない。
だけど、それはなんの慰めにもならなかった。
同じ想いであっても、心はべつべつだったから。

어쩌면,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같은 생각일지라도, 마음은 별개였으니까. - 토우코

触れ合えないふたりの心。
伝えたい想いがあるのに、知りたい想いがあるのに、いつもたどり着けず、立ち尽くしていた。
俺たちはきっと永遠にひとつになれないのだろう。
ひとは生まれてから死ぬまで、ずっとひとりっきりなんだ……。

맞닿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마음.
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도, 알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도, 언제나 닿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는 분명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겠지.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쭉 홀로이다… - 시노부

憧れた虚像をなぞるような会話。どこからどこまでが本当なんだろうか?
ここにはバカな女に騙されてるフリをしているバカな男と、バカな男を騙しているつもりのバカな女しかいないのかもしれない。
동경했던 허상을 흉내내는 듯 한 회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걸까?
여기에는 바보같은 여자에게 속고 있는 척을 하고 있는 바보같은 남자와,
바보같은 남자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같은 여자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 아스나

わかり合えない。わかり合うこともない。
俺たちは永遠に2番目の存在なのだから。
ただ、そこにいるだけのふたり。わかりあえないまま、生きていくしかな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갈 것도 없다. 
우리는 영원히 2번째의 존재니까.
단지, 거기에 있을 뿐인 두 사람. 서로를 이해하지 않는 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 마호

 

이것은 주체로서 타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현상학적 이야기이기도 하고, 야겜적으로는, 플레이어가 히로인을 '공략'하는 구조를 가지는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야겜에서 플레이어는 다수의 캐릭터를 공략하며 히로인의 수만큼 사랑을 속삭이고 히로인에 대한 기억을 축적하지만, 히로인들은 게임이 진행되면서도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한다는, 플레이어가 다분히 기만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 야겜의 대표적인 구조적 한계이고 이는 '토토노'를 비롯한 여러 다른 겜에서도 지적되어 왔다. 본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 '토토노' 류의 게임들과 비슷하게, 플레이어가 히로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 방법은 메타 게임의 소재를 차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과 히로인의 이야기를 연결해 하나의 테마를 가지는 큰 이야기로 엮어내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본작의 주인공인 키타노리는 '화이트 앨범 2'의 주인공인 하루키와는 정반대의 캐릭터성을 가진다. 하루키가 겉으로는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능동적으로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캐릭터라면 키타노리는 겉으로는 예민해보이지만 수동적이고 마음이 여린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히로인을 '공략' 하는 일반적인 주인공과는 거리가 있으며, 인간관계의 시작과 진행은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전적으로 히로인에 의해 수행된다. (어찌 보면 '화이트 앨범'의 구조와 닮은 것 같지만 '화이트 앨범'은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히로인들을 공략하고 다니는 시스템이 있는 게임이면서도 주인공의 성격이 우유부단하다고 설정된 것부터가 큰 모순이 있는 게임이다.)

 

강렬한 첫 씬부터가 토우코의 의지로 서로가 연결된 것이고, 작품 전반적으로 히로인 자신들의 소망이나 의지를 키타노리에게 비추면서 히로인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주인공 위에 놓인다. 토우코는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 토키노리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했고, 시노부는 키타노리를 뒤틀린 자신의 마음을 지탱해줄 지지대로 삼는다. 아스나는 키타노리에게 기만적 태도로 접하면서 자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몰아넣는다. 유키오는 작중 내내 자신의 목적을 키타노리에게 어필하면서 같이 행동하도록 이끈다. 마호는 자신이 하는 사랑을 옆에서 지켜봐주기만을 요구한다. 모든 루트에서 키타노리의 성격은 히로인의 관점에서 키타노리가 보여줬으면 하는 성격을 거울처럼 비추어 줄 뿐이기에 일관성이 없는 듯이 표현된다. 이는 기존의 야겜에서 플레이어가 다수의 히로인 캐릭터들을 공략하면서 각각의 히로인들에게 요구했던 속성 소비와 닮았다는 점에서, 키타노리의 일관성 없는 모습은 각각의 루트에서 주인공이 히로인의 입맛에 맞게 소비된다는, 관계성의 역전을 보여준다.

 

본작의 결말부는 관계가 재정립된 '현재'를 나타낸다. 사랑이 없는, 수단으로써의 육체 관계를 통해 연결된 이 순간은 플레이어가 행해왔던 히로인들에 대한 일방적이고 기만적인 태도를 상징하며, 그 끝에는 서로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평행선을 걷게 되는 결말만이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주인공-종속적인 히로인 관계에서 벗어나 히로인-종속적인 주인공 관계로부터 태어난 연결의 순간을 조명하면서,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덧없는, 그저 순간의 감정일지도 모르고 아직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제서야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시작지점에 섰음을,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어렴풋한 긍정적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본작의 이야기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만을 제시하고 마무리되며, 그렇기에 야겜의 안티테제로서의 역할이 완벽하게 수행된다고 볼 수 있다. 메타 게임의 형식을 빌려 야겜의 모순점을 지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신선한 시도이긴 하지만 다소 전위적이고, 그런 시도들은 플레이어의 시선을 게임의 구조에만 얽매이게 하는 문제점을 보이곤 한다. 우리가 야겜을 플레이하는 이유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캐릭터들과 만나면서 서로가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를 즐기고, 그 속에서 우연히 어떤 메세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야겜의 본질을 분석하기 위한 메타인지나 구조적 해석은 자연스러운 감상의 연장선상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 해석을 하는 행위가 플레이어들에게 강제된다면 좋은 겜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작은 야겜의 탬플릿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은은한 씁쓸함을 남기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만들고, 본작을 넘어서 찾아야 할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남긴다. 본작에서 그 '미래'는, 새로운 관계성-진정한 사랑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주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이 태어난 시간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그 미래를 여는 길이 어디에 있을지 찾는 것은 제작자들과 플레이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해나가야 할 숙제가 될 것이다.